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이하 모임넷)는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모두에게 안전한 임신중지의 권리가 법·제도와 보건의료, 사회복지 및 교육, 노동 등 전 영역에서 평등하고 온전하게 보장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구성된 네트워크 단체입니다. 현재 네트워크에는 총 30개 단체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모임넷은 2025년 11월 7일 발의된 조배숙 의원 외 12인의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4037)에 관하여, 해당 개정법률안 자체가 2019년 헌법재판소 결정을 무력화하고 퇴행시키는 것일뿐만 아니라, 국제법의 권고에 역행하는 방향이며, 임신 기간에 따른 제한과 처벌 조항을 되살려 임신 당사자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아래와 같이 반대 의견서를 제출합니다.
[반대 이유]
1. 헌법재판소 결정에 역행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11일 형법 제269조 제1항, 제270조 제1항 중 ‘의사’에 관한 부분 모두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고 결정하고, 개정 입법 시한을 2020년 12월 31일로 명시하였습니다. 이후 해당 형법 조항은 모두 헌법재판소가 주문한 시한까지 개정 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아 법의 실효를 상실하였으며, 이는 위헌 결정과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미 실효를 상실한 해당 형법 조항의 일부 개정안을 발의하는 것은 헌법재판소의 주문과 그 효력을 무력화하고 역행하는 조치입니다. 이미 실효를 상실한 조항에 대해서는 완전히 삭제하는 조치를 취하거나, 모자보건법상의 위법성 조각사유 등 해당 조항과 연계된 다른 법 조항들을 변화된 법리에 맞추어 개정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2. 한국 정부가 이행해야 하는 국제 인권 규약과 세계보건기구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법·정책 권고에 역행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기구의 당사국으로서 한국 정부가 비준한 국제 인권 규약을 이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임신 10주를 경과하여 임신중지를 하는 당사자와 이를 조력한 의료인 등을 처벌하도록 명시한 조배숙 의원의 형법 일부개정안은 유엔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시민적ㆍ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모든 형태의 여성 차별 철폐에 관한 협약, 고문 및 그 밖의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의 방지에 관한 협약, 아동 권리에 관한 협약 등 여러 국제 규약과 협약에 위배됩니다.
유엔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권리위원회는 2016년 성과 재생산 건강 권리에 관한 일반논평 제22호에서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2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며, “임신중지의 범죄화 또는 제한적인 임신중지관련법 등 폭넓은 범위의 법, 정책, 관행들이 성과 재생산 건강권의 완전한 향유와 관련 있는 자율성 및 평등권과 반차별권을 저해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에 따라, 각 당사국은 “성과 재생산 의료시설ㆍ서비스ㆍ재화 및 정보에 대한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접근을 범죄화하거나, 방해하거나, 저해하는 법ㆍ정책ㆍ관습들을 폐지하거나 철폐할 것”을 핵심 의무사항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임신중지를 경험하는 여성 및 성인간 합의를 통한 성행위에 대한 형사처벌과 같이 개인의 성과 재생산 의료서비스 접근을 가로막는 법적 장벽을 세우는 것”은 이 조약을 존중할 당사국의 이행 의무를 위반하는 사항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2018년 제49차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정부에 대한 최종 권고문에서 “임신중지를 비범죄화하고 처벌조항을 삭제할 것”을 주문하였으며, 2024년에는 더 나아가 “안전한 임신중지 및 임신중지 후 서비스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도록 포괄적인 프레임워크를 마련하고 국민건강보험 계획에 통합할 것”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는 2022년 발간한 임신중지 가이드에서 각국 정부가 이와 같은 국제 인권 협약에 따라 법률과 정책 체계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전제하고 임신중지의 전면적인 비범죄화를 강력히 권고하였습니다. 또한 여기서 ‘비범죄화’는 ▶ 모든 형사상/범죄에 관한 법에서 임신중지를 삭제하고 ▶ 임신중지에 다른 형사 범죄(예: 살인, 과실치사)를 적용하지 않으며 ▶ 임신중지를 하거나, 돕거나, 정보를 제공하거나 시술을 제공하는 모든 행위자가 형사 처벌을 받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제한하는 법률 및 기타 규제, 임신 기간에 따른 규제, 의무 대기기간의 규정, 상담 의무화, 제3자 승인 규정 등이 모두 임신중지를 줄이기 보다는 안전한 임신중지에 관한 접근을 방해하여 임신중지 시기를 지연시키고, 위험한 임신중지 환경을 야기하며, 보건의료 환경을 저해하는 등 위해가 더 크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국제 인권 규약과 세계보건기구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가이드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조배숙 의원의 형법 일부개정안을 반대합니다.
3. 임신 당사자의 건강권, 평등권,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 침해
세계보건기구는 2022년 임신중지 가이드에서 임신 기간을 이유로 임신중지를 제한하는 법률과 기타 규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히면서 그에 관한 연구 결과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가 2010년에서 2020년 21개국에서 연구를 진행한 결과, 임신 기간에 따른 제한은 모성 사망률을 증가시키고 건강 상태를 악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임신기간에 대한 처벌은 보건의료 현장을 위축시켜, 실제 의료 현장에서는 합법적 임신중지가 가능한 시기보다 더 이른 시기에 임신중지를 거부하게 됩니다. 가령 조배숙 의원의 개정안처럼 임신 10주 이상의 임신중지를 처벌하도록 한다면, 실제 의료현장에서는 임신중지 자체를 거부하는 의료기관이 많아질뿐만 아니라, 임신중지를 하는 의료기관 중에서도 6주-8주차부터는 거부하는 의료기관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임신 6주-8주차 경에 임신 사실을 인지하고 임신중지를 고려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 찾아간 병원에서 거부를 당하고, 이후 계속해서 임신중지가 가능한 의료기관을 찾지 못하는 경우 임신중지 시기만이 더욱 지연될 뿐입니다. 결국 당사자는 보다 이른 시기에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하지 못하고 건강에 더 큰 부담이 되는 시기에 안전하지 못한 의료환경에서 임신중지를 하게 되며, 후속 진료를 위한 병원 방문도 하기 어려워 후유증의 위험도 더욱 커지게 됩니다. 특히 지적 장애가 있는 경우, 청소년인 경우, 의료 취약 지역에 사는 경우,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경우 등 이미 사회경제적 상황과 지리적 조건, 고용 상태 등으로 인해 보건의료 기관에 대한 접근성이 낮은 이들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은 임신한 사람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을 침해합니다. 임신중지로 인해 처벌을 받게 되는 사람은 결국 임신한 당사자 뿐이므로 성관계 상대방의 피임 협상에서부터 불평등한 조건을 형성하며, 심지어 폭력적인 관계에서도 상대방의 요구와 협박에 취약해지게 만듭니다. 설령 처벌로 인해 임신을 유지하게 된다고 해도 이와 같은 취약한 상황에서는 안전하게 출산을 하고 양육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미 ‘낙태죄’가 존속하던 시기에 이와 같은 사례가 다수 발생해 왔으며, 많은 여성들이 고소고발 협박과 폭력에 시달리고도 재판에서 홀로 처벌을 받게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은 임신중지에 관한 상황만이 아니라 성관계, 피임, 출산과 양육 전반에 걸쳐 당사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불평등을 강화하며, 취약한 조건을 야기함으로서 평등권과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 전반을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결 론]
이와 같이 조배숙 의원 대표발의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4037)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역행하며, 국제 인권 규범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임신 당사자의 건강권과 제반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사회경제적으로 불평등하고 취약한 여건에 있는 이들에게 더욱 심각한 영향을 미치므로 본 개정안에 강력한 반대의 의견을 제출하는 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