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차별로 노동운동하기
작성자: 김다정(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장애여성공감은 함께 배우고 경험을 나누며, 서로 지지하는 장애여성학교를 9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장애여성학교는 미술반, 음악반, 한글반과 장애와 여성주의반이 운영되고 각 반들은 올해 장애여성학교의 기조인 “반차별”과 “공동행동”을 각 반의 방향과 특성에 맞게 풀어내고자 합니다. 이 중 장애와 여성주의반은 다양한 운동은 반차별과 어떻게 만나는지 함께 배워보고, 복잡한 차별구조를 알아보며 우리는 운동과 일상에서 어떻게 반차별 운동을 해나갈 것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변화를 맞고 추동할 수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장애와 여성주의반 여섯번째 리뷰는 민주노총에서 활동하고 계신 곽이경님의 강의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들어가며
임금, 고용, 교섭, 단협(단체협약)과 같은 말들을 사용하며 노동자들에게 가장 좋은 협상안을 만들어 내는 것을 노동운동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쉽게 수긍하지만, 교섭된 단체 협약이 반차별의 원칙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거나 어떤 노동운동의 요구가 사회로 나갔을 때 다른 누군가를 차별하게 되는건 아닌지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이 모두 노동운동이라고 하면 어려워하는 동시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또한 노동운동 현장에서 ‘성소수자’들이 마주하는 차별을 바꾸기 위한 활동을 제안하면, 언뜻 ‘그것은 노동운동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마치 노동운동과 여러 인권단위의 운동은 우호적인 관계로 서로 응원은 할 수 있지만, 각각 서로 다른 진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다면 노동운동과 반차별을 위한 인권운동은 정말 서로 다른 이야기일까? 먼저, 1987년 처음 노동조합을 만들던 그때의 노동운동에서 냈던 목소리를 살펴보면,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면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두발자유, 불량도시락 거부, 생산직과 사무직 명찰 차별금지, 관리직과 같은 통근버스 이용, 간이 세면대 설치 등 노동자에게 모멸감을 주는 부당하고 차별적인 대우를 바꾸고자 하던 ‘인간’으로서의 노동자의 기본권을 보장해달라는 목소리였다. 30년 전의 이 차별들 중 몇 가지는 현재까지도 어떤 노동자들에게는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동시에 청소년운동, 여성운동, 성소수자운동 등 다양한 진영의 인권운동에서 바꾸고자하는 차별과도 서로 닮아있다.
이처럼 노동운동은 차별에 반대하는 요구에서 시작되었음에도 반차별의 원칙을 노동운동에 담아내는 것이 마치 어렵고 새로운 무엇인 것처럼 느껴진 것은 왜일까. 노동운동이 암묵적으로 정상성을 중심으로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묵인하고 동조했기 때문이다. 처음 노동자에 대한 차별 반대를 외치던 노동운동은 역설적으로 노동자가 노동자를 차별하면서 되면서 반차별의 원칙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노동운동과 반차별이 만나던 순간 –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
소위 정규직을 ‘경쟁을 통해 정당하게 자리를 얻은 승리자’라고 말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경쟁의 결과라는 이름으로 손쉽게 정당화된다. 마치 비정규직은 노력하지 않아 경쟁에서 진 사람, 그래서 그 차별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고 하면, 정규직은 자신이 얻은 ‘승리’에 대한 보상을 박탈당하는 것처럼 혹은 비정규직이 노력없이 부당한 승리를 얻는 것처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한다. 그것이 경쟁의 원리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 위계질서를 갖는 구조에서는 경쟁은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이 존재한다. 이 믿음과 위계질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를 미워하고, 갈등하게 만든다. 정규직들은 알아서 비정규직을 짓밟고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데 힘을 쓰고, 비정규직들은 이기적인 정규직들이라며 회사와 자본가보다 정규직들을 더 미워하게 된다. 이런 갈등 속에서 결국 이득을 보는 승리자는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근본적인 구조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데에서 시작한다. ‘과연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는 그 경쟁은 공정할까?’, ‘정말 정규직은 승리자일까?’, ‘중요한 일과 하찮은 일이란 무엇일까?’…
노동은 서로 협업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업무라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그 조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에 있어서 중요한 일과 하찮은 일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일부러 소수의 중요한 일을 설정하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경쟁을 통해 몇몇 사람에게만 나눠주어 위계질서를 만든다. 이렇게 위계질서를 만들고, 서로 다르게 대하는 것에 경쟁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놓으면 차별을 차별이라 부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업무의 계급은 곧 그 업무를 담당하는 노동자의 계급이 되어 하는 일에 따라 그 사람을 차별해도 그것은 더 이상 차별이 아니게 된다.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정규직이 하찮은 업무를 담당하는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것이 정당화 되고, 회사의 ‘가장 중요한 업무’인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자본가는 노동자 위에 올라서 차별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들은 다함께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노동현장에서 각자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함께 저항하지 않으면 노동자 전체에 대한 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댐의 작은 구멍을 막지 않으면, 무너질 것을 각오해야하듯이 차별도 소수의 집단에게 가해지는 차별이라도 함께 바꿔나가지 않으면, 전체 노동자에 대한 차별로 이어진다. 이렇게 노동운동은 반차별의 원칙을 운동의 원동력으로서 만나게 된 것이다.
노동운동에 반차별이 함께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에 반차별의 원칙을 적용해야하는 이유가 분명하지만, 현실에서는 아직 어려움이 있다. 여전히 여성 노동자의 노동은 가볍고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건설 현장에서 여성과 성소수자에게 화장실과 탈의실은 특별대우다. 성소수자 노동자는 일상적인 노동현장에서 배제와 삭제를 겪고, 이주노동자는 체류권을 인질삼아 낮은 임금과 인권침해를 당한다. 모두가 지나치게 좁은 ‘노동자’의 의미 때문이다. 노동자의 의미가 확장되어야 한다. 아직도 현실의 노동현장에서는 여성과 성소수자, 이주민 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정체성을 배제하고 있다. 노동현장 밖의 차별이 노동현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연대를 통해 사회에 반차별을 외쳐서 노동현장에도 반차별이 깃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차별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먼저 차별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차별을 인식하려면, 차별받는 대상의 존재를 늘 함께 생각하려고 노력해야한다. ‘이 결과가 다른 누구에게는 차별이 되지는 않는지’, ‘이 결과에 누군가 배제되지는 않는지’, ‘이 과정에 평등하게 의사가 반영되었는지’ 등등 노동현장 잘 아는 노동자들이 반차별의 원칙들을 의식하고, 직접 현장의 차별적인 요소들을 바꿔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현장과 노동운동에 여러 정체성의 당사자가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당사자가 있다고해서 모든 차별을 알아차리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정체성 당사자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고려해야 할 점들이 늘어나고, 해당 당사자가 머물수록 더 많은 당사자가 함께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노동운동에서의 반차별은 모두가 노동자라는 동일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가 가진 다양성이나 차이를, 나이, 성별, 인종, 국적과 같은 차이들을 정확하게 인식할 때 가능한 것이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 경험하고, 관계 맺고, 함께 할 때 자연스럽게 다양한 차이를 인식할 수 있고, 다양성을 차별로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맞설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물론 평등하고 존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권교육도 함께 이루어져야하지만, 무엇보다 함께 어울려 사는데서 오는 변화가 크다.
맺으며
삶에서 노동자로 보내는 시간이 긴 만큼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아 어느 때보다 유익한 시간이었다. 특히 이 리뷰를 적기위해 강의가 녹음된 파일을 통해 여러번 곱씹어 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처음 강의를 들을 때에는 놓치거나 의미를 제대로 가져오지 못했던 부분들이 두 번째, 세 번째 들으면서 선명하고 의미 있게 다가왔다. 특히 노동자를 둘러싼 ‘위계질서’에 대한 관점이 매우 인상 깊었다. 하찮은 일과 중요한 일의 설정을 통한 업무의 계급화, 그리고 경쟁과 위계질서를 통해 차별을 정당화하게 되는 구조까지 평등이 왜 반차별에 있어서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