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장애여성 성폭력 사건 성명서]
‘위력’을 악용한 조직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해 추행의 고의가 없다며 방조한 재판부는 각성하라
2019년부터 6년간 힘겹게 싸워온 부산 장애여성 성폭력 사건 중 일부가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항소심은 피고인의 여러 가해행위 중 원심에서 유일하게 유죄 판단한 혐의에 대해 ‘무죄’로 판단하였다. 항소심은 원심 판결에 대해 심도 있게 살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가해자의 관점에서 추행의 고의가 없다며 방조한 항소심 재판부를 강력하게 규탄한다.
해당 사건은 단체 대표가 친밀함을 이유로 본인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악용하여 장애여성 활동가에게 동의하지 않은 신체접촉을 오랜 기간 자행한 중대한 성폭력 범죄이다. 피해자는 조직 내 성폭력 사건으로 2차 피해가 심해지자, 보호조치 및 재발 방지를 단체 대표인 가해자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가해자는 대표로서 피해자를 보호할 책무가 있음에도,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를 방관하며 범죄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가해자는 유급휴가를 신청하는 피해자에게 사직서를 종용하여 심각한 인사상 불이익 등 부당처우를 하기에 이르렀다.
남성-대표 중심의 장애인권운동 현장은 탈시설한 20대 초반의 뇌병변 장애여성 활동가가 동등한 동료로서 존중받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러나 피해자는 성평등한 조직문화 개선을 위해 여러 변화를 모색하였지만 그러한 노력은 폄훼되었다. 사건 공론화 이후 피해자는 주변 동료로부터 가해자 옹호. 피해 경험 의심, 개인 간의 문제로 사소화, 조직 내 권력다툼으로 성폭력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는 등 차별적 발언을 숱하게 들어야 했다. 심지어 따돌림, 사직 종용 등 조직 내 성폭력 사건 발생 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2차 피해와 실질적인 부당함을 겪으며, 결국은 10년 넘게 활동했던 조직과 신뢰했던 동료들을 떠나게 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피해자와 지원단체들은 재판부에게 행위 유무에 관한 판단만이 아니라 조직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연결하여 피해자의 호소를 부디 헤아려 가해자를 엄벌에 처해달라고 탄원한 바 있다. 그러나 재판부는 지엽적인 정황 중심의 증거판단과 추행의 고의가 없다는 편협한 법적 기준에 근거하여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동료가 아닌 ‘여성’으로 대상화되는 남성중심의 권위적 조직문화, 재판부 판단에 기대어 책임을 회피하는 조직들의 행태가 고착화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을 각성해야 한다.
원심은 공소사실 4건 중 1건에 대해 피해자의 진술신빙성을 높이 평가하였고, 피해자가 고심 끝에 고소를 결정하게 된 경위와 맥락에 대해 중요하게 살폈다. 그리고 가해자가 대표로서 피해자가 도움을 구하는 처지에 있었음에도 자신의 범행을 예외적으로 정당화하는 언행을 하며 강제추행한 바 피고인과 피해자의 지위 및 관계, 범행 경위와 수법 등에 비추어 그 죄질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피해자가 피해가 발생한 장소, 주변 상황에 대한 묘사 등을 정정한 것은 지엽적인 사정에 불과하다며 최종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항소심은 원심에서 유죄 판결한 공소사실까지도 가해자가 제출한 증거자료 기반했을 때 피해자가 주장한 날짜에 피해가 있었으리라 확신하기 어렵다며 원심을 파기하였다.
원심과 항소심이 무죄로 판단한 근거는 주변사람들도 기억에 남지 않거나, 목격하지 못했기에 추행에 이르지 않은 일상적 행위였을 것이라는 점, 공개된 장소여서 다수의 사람이 있었다는 점, 심지어 가해자가 접촉한 신체부위가 성적으로 민감한 부위라거나 성적으로 크게 의미를 가지는 행위라고 보기는 어려워 성적 불쾌감을 일으킬 정도에 이른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전형적인 성폭력 통념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가 조직 내 다른 성폭력 사안에 대해 제기하고 있기에 가해자가 피해자로부터 문제제기를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추행한다는 것은 쉽게 상정하기 어렵고, 가해자의 장애 상 상체 사용에 어려움이 있으며, 휠체어를 사용하는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로 인해 추행이 불가능하리라 유추되고, 일부 증인들의 진술이 피고인 진술에 부합된다고 판단하였다. 가해자의 장애라는 물리적 조건, 참고인과 가해자의 관계성을 면밀히 살피지 않은 채 편협하게 가해자의 관점에서 판단한 결과다. 피해자는 원심의 ‘일상생활 중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비의도적 신체접촉’에 대해 반박하며, ‘명백하게 불쾌감을 느낀 추행행위’였음을 강하게 제기하였음에도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항소심이 진정 파기해야 할 것은 조직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한 매우 지엽적인 판단이다.
재판부의 부당한 판결에 대해 피해자는 검사에게 직접 전화를 하여 항소를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항소하지 않았다. 검사의 항소권은 수많은 피해자의 권리이기 때문에 검사 개인의 고유권한이라고 볼 수 없다. 검사는 항소로 인한 법리적 실익을 따지기 이전에 피해자의 억울하고 분통한 입장을 적극 반영하여 반드시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그것이 시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국가기관으로서의 방향이고 책무이다. 검사가 상고를 하지 않은 것은 결국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의 잘못된 판단에 편승한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 판결을 그대로 방치하고 용인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는 피해자가 정당하게 구제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길마저 차단한 것이고, 국가기관이 지켜야 할 시민의 권리를 스스로 저버린 행위이다. 나아가 이러한 결과는 사건의 본질을 외면한 채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본 사법 체계 전반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지난 9월 4일, 강미정 조국혁신당 대변인이 조직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해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하며 탈당을 선언한 바 있다. 이에 최강욱 민주당 교육연수원장이 “그렇게 죽고 살 일인가”라고 발언한 것이 재조명되었다. 이같은 상황은 주요 정당의 조직내 성폭력 사건에 대한 태도와 관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이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이 참담할 뿐이다.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은 공적인 권력관계에서 발생하기에, 조직 구성원 누구도 성폭력 사건의 발생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조직 내 성폭력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사회에 발 딛고 살아가며 숨 쉬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조직은 단순히 재판부의 판단에 기대거나 절차적 정당성을 명분으로 피해자를 배제하며 침묵의 카르텔로, 조직이 책임질 시간과 과정을 유예하거나 회피하지 않아야 한다. 나아가 공동체적 해결과정을 통해 가부장-남성 중심의 위계적 구조를 성찰하고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사회 내 조직, 공동체 하나하나의 변화, 다양한 문제제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사회의 각 기관이 성희롱, 성폭력 사안에 대해 별도의 고충처리 과정을 두는 이유는 수사법적 과정과 다르게 인권과 성인지 관점에 기반을 두어 사안을 폭넓게 살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수사법적 기준의 부당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 역시 운동사회의 책임이기도 하다.
피해자와 연대하며 조력한 부산여성장애인인권활동가고OO성폭력사건대책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성평등위원회는 뼈아픈 성찰을 통해 장애인권운동이 성평등, 성인지적 관점에 기반을 두어 조직 방향과 활동이 재건되고 피해자가 다시 동료들의 지지를 받으며 일상과 운동현장으로 복귀하여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분투해왔다. 2차 피해 조사, 성평등한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피해자와 협력하여 지역 워크숍, 교육, 전장연 성평등위원회 내규개정 등 다양한 형태의 재발방지대책을 치열하게 마련해왔다.
이러한 과정은 현재진행형이며, 어딘가에 있을 피해자에게 연대의 마음을 보내고 운동사회에 변화의 물꼬를 트는 일이다. 성평등한 조직문화와 조직 내 민주주의는 운동사회가 사회변화를 요구해내며 투쟁하는 방향과도 중요하게 연결되며 기본 토대가 되어야 한다. 공동체적 해결 역량의 축적은 이른 성취의 기록이 아닌 지난한 실패의 과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순진무구한 피해자, 절대적인 악인 가해자가 존재하는 완벽한 사건 처리와 해결은 어디에도 없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제하는 것이 아닌, 특정 가해자의 문제로 사안을 개별화시키는 것이 아닌 더 많은 말들이 터져 나와야 한다. 때로는 실패하더라도 조직의 민주적이고 성평등한 문화를 위해 일상의 투쟁을 조직해 내야 한다. 피해자의 일상회복은 가해자에 대한 사법적 처벌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2025년 9월 16일
부산여성장애인인권활동가고OO성폭력사건대책위
법무법인 한올, 부산여성단체연합, 사)부산성폭력상담소, 사)부산여성장애인연대, 사)부산여성장애인연대 부설 성·가정통합상담소, 사)부산장애인부모회, 사상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송시섭교수, 부산여성상담소·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 장애여성공감,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