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라는 슬로건으로 진행되는 장애여성공감 20주년 기념식이 이번주 금요일에 진행됩니다. 장애여성공감 20주년을 맞아 활동가들은 활동현장에서 겪는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는 무엇인지 각자의 “불”을 적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복주: 불청객]
나의 가족에게 나의 장애는 가정폭력의 원인이기도 하여, 나는 가족에게 불청객으로 존재한 적이 있었고, 나의 친구에게 나의 장애는 친구들의 속도에 따라갈 수 없어 불청객으로 존재한 적이 있었고, 나의 연애에서 나의 장애는 선택받지 못하는 매력적이지 않는 몸이라서 불청객으로 존재한 적이 있었고, 내가 사는 살고 있는 이곳은 나를 배제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반갑지 않는 존재로 등장하면서 살아가겠다.
[미경: 불호]
우리는 언제나 불호(不好)한 존재들이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출신 국가가 다르다는 이유로, 병력이 있다는 이유로,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이 다르다는 이유로… ‘정상’이라는 규범에 들어가지 않는 수많은 다름은 ‘비정상’이 되어 ‘불호한 존재’가 된다.
이 시대가 불호하는 존재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 이 사회에서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기를 요구 받는다. 불호한 존재들은 애당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와 자원과 언어를 가질 수 없도록 일상에서 배제되고 소외된다.
정상과 비정상을 끊임없이 나누고, 정상적이지 않은 불호한 존재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섬뜩한 시대’를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
어느 누구도 어떠한 이유로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될 이유는 없다. 누구나 각기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으며, 누구나 사회적 소수자성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눌 수 있다고 믿는 기만적인 시대라면, 우리는 기꺼이 ‘비정상적인 불호한 존재’가 될 것임을 선언한다.
더욱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불호한 존재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가시화 되고 있는 이 시대에,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차별금지법 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업임에도 ‘나중에’를 말하는 국가라면, 이제는 국가가 우리를 불호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국가를 불호함’을 선언한다.
나중은 없다. 더 많은 불호한 존재들과 연대하며, 국가가 불호하는 존재들이 누구인지, 이 시대에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비정상이 존재하는지, 우리가 국가를 왜 불호하는지를 낱낱이 드러낼 것이다. 기대하시라! 정상성에 대한 허상이 어떻게 균열되는지를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불호)의 정치’로 보여주겠다.
[진희: 불결]
농성장은 치워도 지저분하다. 사람이 모이고 싸우는 곳, 관계가 머물렀던 공간은, 기억을 담은 공간은… 보통 지저분하다. 쿰쿰한 냄새, 피로와 더러움이 묻은 얼굴, 오염된 곳은 불구의 몸을 환대한다.
살균은 냄새를 지우고 탈색시킨다. 더 청결해지기 위해 더 많은 쓰레기와 오염을 만들고, 모든 균을 죽인다. 사회정화를 위해 때론 사회통합을 위해, 천하고 추잡한 “불결”한 사람들을 골라내어 차별해 왔다. “더러워”라고 혐오를 표현했다.
자기관리와 위생, 낡지 않은 새 것, 혼란 없는 질서의 시대. 불결함을 다시 쓴다. 관계에 몸을 담그고, 기억을 묻히며, 아직 오지 않는 세계를 치우지 못하고, 스스로를 오염시킨다. 주변을 오염시킨다.
[은선: 불응]
장애가 있는 너는 –
“착하고 친절해야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피나는 노력을 해서 극복해야 한다.”
라는 당신의 모든 말들에 ‘불응’ 하겠습니다.
나는 이 시대에 불응하는 몸으로
이 시대에 불응하는 생각으로
이 시대와 불응하는 장애여성으로
계속 살아가겠습니다.
[은희: 불친절]
불친절보다 나쁜 것은 친절을 가장한 낙인과 배제이며, 그로인해 덮여지는 차별이다.
그런 친절은 거부하는 나는 활동가이다.
[진아: 불감증]
불감증(不感症)
좁고 탄력 있는 젊은 질은 누구의 감(感)을 위한 것인가요?
우리의 불감증은, 상대의 욕망을 위한 성기개선으로 치유 될 수 있는 걸까요?
다양한, 각자의 욕망은 여전히, 언제나, 어디서나 페니스를 위한 ‘정상적인’ 욕구로 귀결됩니다.
그 속에 포함되지 못한, 비정상적이고 비생산적인 개별의 욕망과 욕구, 그리고 남겨진 성기들은
실패하고 뒤틀린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더러는 치유받기를 강요받습니다.
나는 이 요구에 불응하겠습니다.
그렇기에 페니스를 위한 정상적인 욕망에 불감하겠습니다.
나의 이 불감은 온전한 나를 비정상적인 욕망으로, 불순한 존재로 규정하는 탓입니다.
불완전하고 비정상적이고 비생산적인 나의 욕망은, 나의 감(感)은
좁고 탄력 있지 못한 성기를 지닌 채 비정상적인 감(感)으로, 이 시대와 불감하겠습니다.
[은지: 불행]
불행하지 않은 삶을 위해 사회에선 ‘정상’에 가까운 사람이 되라며 행복 언저리의 길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길을 거부하겠다. 그리고 그 거부의 길을 같이 걸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것이다.
[유정: 불구하고]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 길을 간다.
나의 소신과 뜻이 있는 길을 만들어 간다.
누군가는 혐오의 깃발을 치켜세우며
목청 높여 울부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춤추고 노래하며 연대할 것 이라고.
타인의 잣대에, 대중의 목소리에, 정치적 암묵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나의 길을 갈 것이라고.
[다혜: 불안]
쓰다.
불안의 맛은 항상 쓰다.
쓸모없는 몸이 될까 두렵다.
쓸모의 기준을 뒤엎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도
언제나 나의 쓰임새를 의심하며 조바심을 낸다.
씁쓸하다.
나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쓸모’가 중요한 사회에서
스스로의 쓸모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가난과 무능의 자랑.
굴욕에 뒤따르는 떡고물이라도 먹으려면
어중간하게 쓸모 있을 바에야
차라리 전혀 쓸모없는 것이 더 낫다.
쓸데없다.
누군가는 나의 활동을
쓸모없는 일이라 말한다.
‘쓸데’는 쓰일 자리라는데
이 세상에 과연 우리의 자리가 있기나 할까 싶어
쓸쓸하다.
쓴다.
그래도 우리는 쓴다.
불안의 쓴맛이 늘 뒤따라도
씁쓸하고
쓸쓸해도 쓴다.
내가 지금 뭐라고 말하는 건지
나조차 모르겠는 순간에조차도
일단 쓴다.
사회가 부여하는
쓸모의 기준에 대해
쓸모의 가치에 대해
쓸모의 자격에 대해
쓸모의 쓸모에 대해
쓴다.
그것이 우리의 쓸모라서.
[난슬: 불시착]
예상치 않은 장애로 인해 착륙하다.
주류 사회의 경험 안에서 준비하고, 닦아놓은, 최소한의 시행착오로 도착할 수 있는 삶 안에 포함될 수 없는 소수자의 삶은, 언제나 불시착이 예상된다.
이미 장애로 불시착을 예상하고도 출발해야하고, 또, 도착해야하는 삶. 불시착을 예상하고도 몸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삶. 언제나 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과 상황에 떨어져 온몸으로 충격을 받아내야 하는 그런 삶.
공감에서는 몸으로 겪은 불시착들에 대해 나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리프트, 언제 출발할지도,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장애인콜택시, 생리, 신변처리, 성폭력, 다른 길이 없어 피해 다닐 수도 없는 위험,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눈, 나의 존재를 혐오하는 사람들…
출발하지도 도착하지도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의 편견들을 깨고 출발하고, 불시착하고, 도착한다.
공감에서는 또 다른 불시착을 더 단단히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연습을 한다.
불시착 경험을 표현하고, 분노하고, 경험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언어를 함께 만들고, 이를 연극으로 만들고, 글 쓰고, 노래하고, 투쟁하고, 연대한다. 또, 언제 어떤 상황에 또 불시착할지도 모르니, 함께 소리 지를 연습도 한다! 꺼져!
[민들레: 불우]
불우는 ‘처지나 형편이 딱하고 어려움‘으로 알고 있지만 진짜 뜻은 ’재능이나 포부가 있음에도 좋은 기회를 만나지 못함‘이다.
장애여성 인권활동을 한다고 하면 좋은 일 한다며 ‘불우 이웃 돕기‘를 떠올리면서 불쌍한 장애인을 돕는 일쯤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먼저 ’불우‘는 형편이 딱하고 불쌍한 것이 아닌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라는 뜻을 다시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우리는 가만히 때를 기다리기 보다는 스스로 그 때를 만들어 가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 가는 ’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두 평등하고 인간답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 난 아직 불구의 시대를 살아가는 불우한 사람이다.
[성선: 불청객2]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불청객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달갑지 않은, 초대받지 못한 존재가 된다 해도 목소리를 내겠습니다. 이젠 더 이상 누군가에 의해 우리의 존재가 지워지는 일에 물러나 있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대가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 되겠습니다.
[진경: 불필요]
우리는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
쓰이는 데가 없고,
소용되는 바가 없는
사람들.
태어날 필요가 없는
공부할 필요가 없는
일할 필요가 없는
말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
무엇도 기대 받지 않아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언제나 예외적 존재여서
항상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쓸모없는 것들을 모아서
불필요한 일들을 쌓아서
세상의 필요를 무너뜨리면 좋겠다.
[타리: 불순]
공손하지 못해서 순수하지 않습니다.
불순한 마음을 가졌다. 착하지 못하고 순수하지 못하다.
차별과 억압, 그리고 기쁨과 행복을 동시에 생각하는 마음은 불순하다.
우리는 싸우지만 동시에 돌보고 의존하는 마음도 피어난다.
이 복잡한 마음은 권력에 공손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불순한 생각을 가졌다. 우리는 불온한 사상에 대해 배우고 전파한다.
지식의 권력에 대해 공손하지 못한 태도로, 그 어떤 지식도 그 자체로 완전하다거나 최고라는 생각에 반대하면서. 페미니즘, 장애학, 비판적 사회이론, 철학 모두 순수하지 않다. 이론과 경험은 섞여있으며, 이론과 경험들 안에서도 계속 도전과 변화가 필수적이다.
불순한 몸을 가졌다. 착한 몸을 찬양하는 시대지만 우리의 몸은 기능도, 실루엣도, 몸을 움직이는 방향성도 착하지 않다. 우리는 기능과 형태를 온전히 갖추지 못한 불구의 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지워버린다. 우리의 움직임은 정상성과 질서를 온전히 기능하고 갖추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몸을 쓰는 목적과 방향은 이 세상의 불화하는 존재와 장소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정행: 불편]
사회적 약자로 충분한 권리를 확보하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는 불편함은 사회적 불리함의 원인이 되어 불평등을 초래(招來)하고 있다. 그 불편함을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여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 불편함이 제거되어 공감하는 감수성을 가지고 평등한 사회가 시작되어야 한다.
[여름: 불만]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고 통합을 외치는 이 시대의 부조리함에 불만합니다. 또한 그렇게 선택받은 존재들의 인권만을 우선하는 이 시대의 오만함에 불만합니다.
[나은: 불규칙]
언제 올지 모르는 장애인 콜택시, 갑자기 고장 난 엘리베이터, 휠체어를 가로막는 턱,
나를 돕겠다며 동의 없이 참견하는 사람들.
우리는 차별이 가져오는 불규칙한 삶 속에서 삽니다.
위험한데 집에나 있어, 부모님 죽으면 시설로 들어가야지,
조금 돈 벌자고 힘들게 일하지 말고 수급비나 받아, 남자 잘 만나서 편하게 살아.
우리는 규칙대로 살라고 요구받습니다.
우리는
장애여성들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불규칙과
장애여성들에게 요구되는 불편한 규칙들에 대해 질문하고 저항합니다.
불규칙함이 우리의 존재를 뒤흔들 수 는 없습니다.
규칙들로 우리를 가둘 수 없습니다.
[서연: 불면]
불면의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는 것을 안다. 아직 눈감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이란 순간은 잘 오지 않고 도무지 끝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덕분에 나의 활동은 마무리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현장은 평생직장이다. 이야기를 밑천으로 삼아 살아간다. 나를 지탱하는 건 사람들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불면상태로, 그렇기 때문에 예민하고 신경이 곤두선 채로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나무: 불허]
가난한 청소년
비문해(교육받지 못한) 여성
장애여성
성소수자
장애아동청소년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만났었고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들
가난해서
나이가 어려서
배우지 못해서
여자여서
성소수자여서
장애가 있어서
부모에 의해
교사에 의해
성인에 의해
남성에 의해
경제력에 의해
권위주의에 의해
제도권 교육에 의해
가부장제에 의해
비장애인 이성애 중심 사회에 의해
많은 것들을 불허(許) 당하는 삶
하나가 아닌 다양한 정체성이 서로 얽혀
너무나도 닮아있는 존재들
빈곤, 청소년, 비문해여성, 장애여성, 성소수자, 장애아동청소년 그들과의 만남을 의도한 적 없다. 예측하지 못했던 만남이었다. 그러나 불허당한 존재들과의 예측불허였던 만남을 통해 허(許)의 기준에 불응하는 불순한 의도를 새롭게 알게 되었고, 지금의 내가 존재하게 되었다.그렇게 우리는 불허당한 존재가 아닌 불응하는 존재로 함께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