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 없는 돌봄, 완결되지 않는 자기
– 돌봄추리극 <주렁주렁 치렁치렁> 리뷰
장기영(공연예술평론가)
돌봄은 의식적인 일이다.1 특히 돌봄을 어느 몸이 어떠한 환경에 ‘자연스레’ 적응하지 못하여 타인의 개입을 요할 때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면, 즉 돌봄수혜자(care-receiver)와 돌봄제공자(care-giver)가 명확히 구분되어 관찰 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때 보면 더욱 그렇다. 2 가령, 내 몸이 돌봄을 요하는 몸일 때 나는 내 몸이 ‘그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 의하여 나의 의식은 내 몸이 가지고 있는 취약성을 집중하게 된다. 한편 이곳에 ‘자연스레’ 적응하지 못하는 몸이 있음을 의식하는 일 즉 타인의 몸이 돌봄을 요하는 몸임을 감지하고, 그의 몸이 이곳에 적응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떠올릴 때에 돌봄은 일어난다. 더욱이 최근 돌봄 관련 여러 의제에서 돌봄이 대개 ‘자기의 외부’로부터 오는 것으로 다뤄지면서, 돌봄을 요하는 몸과 돌보는 몸 사이의 긴장감을 빼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점들에 집중하다 보면 돌봄은 마치 외부의 개입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개입과 그에 따른 긴장 상태는 ‘내 몸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극단 춤추는허리는 돌봄추리극 <주렁주렁 치렁치렁>(이하 <주렁 치렁>)을 통해 자신의 몸을 돌봐야 하는 일의 어려움, 혹은 자신의 몸을 돌봐주는 다른 몸과의 관계적 긴장감 등을 이야기한다. 공연은 기억에 대한 불안과 그 대안을 얘기하는 상미와 미진의 이야기(제1장 기억집착)로부터 시작하여, 침상에 누운 채로 등장하여 방울 소리로 소통하는 정민과 그의 말을 낭독해주는 은선의 무대를 보여준다(제2장 관종소리). 이어 등장한 화영은 자신의 연기와 매력을 단독으로 발산하면서 동시에 그가 늘 보는 ‘눈치’에 대하여 말하고(제3장 인기욕심), 항암 치료 중인 지원은 영상으로 등장한다. 다채로운 숏구성에 의하여 지원의 연기하는 몸이 포커싱되고, 그의 숨소리와 함께 뱉어지는 말들에는 점점 취약해지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드리워져 있다(제4장 나노연기). 이어 쌍둥이인 은선과 성선은 모친인 은분과 찍은 영상을 통해 서로 닮은 취약성, 그리하여 이 취약성을 관리하며 사는 삶의 노하우 등 ‘유전’과 ‘취약성’을 공유하는 가족 사이의 복잡다단한 감정값을 이야기한다(제5장 복, 붙).
공연 내내 퍼포머들이 각기 다른 취약성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럼에도 이 공연이 취약성에 대한 전시로 환원되지 않는 이유는, 내 몸으로 사는 것 그리고 내 몸과 함께 사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개개의 취약성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으로 의미화가 종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들은 결국 돌봄의 맥락 안으로 기워진다. 고통을 감각하는 일은 몸을 ‘표면화’하여 내 몸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를 알게 하지만3
, 돌봄의 맥락 안에서 “피부 안쪽이 자기라는 근거는 없다”4. <주렁 치렁>은 ‘자신으로서’ 겪는 장애에 초점화하는 한편, 그것이 ‘자신만의’ 고통으로 환원되지 않기 위하여 돌봄의 논리 안에 자리한 ‘자기들’이 “덩굴손”5처럼 얽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말한다.
1. ‘배어있는’ 취약성
이 공연에서는 각각의 취약성을 지닌 이들이 등장하여, 자신의 몸으로서 (자신을 비롯한) 무언가를 돌보는 일, 혹은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이와의 어려움들이 다양하게 토로된다. 특히 이들은 자신의 취약성을 부러 꺼냄으로써 무대 위에서 ‘돌봄’이라는 화제 혹은 주제를 다루는 일에 완성형의 문장으로써 발화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가령, 상미는 이따금 제 대사를 잊어서 대본을 보며 말했고, 정민의 말은 은선의 번역 없이는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화영은 단독 공연자로 존재하며 자신의 몸짓과 기운을 자신 있게 드러내지만 여전히 눈치 보고 있는 것들을 열거했고, 무엇보다 지원은 이날 무대에 등장하지 못했다.
이 무대 위에서는 ‘극적으로’ 통제 가능한 드라마틱한 취약성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6
이 무대에서 취약성은 은폐될 것으로 위치 지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계속 호출하는 정서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자신이 미처 다 알 수 없는 것들을 마주해야 할 때 발생한다.
정민: 나의 두려움은 아픈 거야. 아파서 일상이 변할까 봐.7
화영: 앞으로 심장이 느리게 뛰면 기어 다니거나 해야 할 거 같아. 기어서라도 살아야 할 거 같아. 밤마다 시끄러운 호흡기랑 잠을 자. 언젠간 호흡기와 함께 공연해야 할 거 같아. (5쪽)
지원: 나 계속 연극할 수 있을까? 나한테 연극밖에 없는데 그거를 못 하게 될까봐 너무 무서워. (6쪽)
[사진1] 3장 인기욕심 화영의 공연 사진. 무대 실시간 영상 스크린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다.

[사진2] 4장 나노연기 지원의 공연 사진. 지원이 수동휠체어에 앉아 나노연기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은, 그리고 그 돌봄에 대하여 말하는 일은 사실 내 몸을 분해하여 인식하는 일이다. 화영은 자신에게 장애가 “배어있음”을 말한다.8)장애는 극적인 시공간에도 멈춰질 수 없는, 공공질서가 작동해야 하는 시공간에서 자기관리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취약성으로 감각될 때가 많다. 통제 및 조절 능력의 발현, 혹은 환경과의 우연한 적응이나 그 적응을 관리해왔던 노하우 등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어려움 없는 몸으로 느껴지거나 여겨질 수 있지만, “배어있는 장애”를 말하는 일은, 그것이 언제까지, 어디까지 가능할지 아무도 자신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음을 끊임없이 인식하는 일이다. 타인 돌봄뿐 아니라 자기 돌봄이 자신의 일상에서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일일 때 두려움은 만성적인 것이 된다. 두려움은 지각, 기억, 상상, 개념, 판단 등 자신의 인지 기능에 확신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든다.
이 공연에는 ‘돌봄추리극’이라는 표제가 달려 있다. 이 표제는 사실상 극단 춤추는허리가 계속 움직여가는 이 공연의 정체를 어떤 방향성으로 수렴할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으로 보인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돌봄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들의 ‘추리’가 이 공연으로써 실천/실행 중임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추리는 돌봄이 무엇인지, 이 공연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한 미정(未定)을 뜻할 뿐 아니라, ‘자기’란 무엇인지 즉 확신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말값으로도 읽힌다.
퍼포머들의 두려움은 미래형으로 향해 있다. 위의 인용문처럼 퍼포머들은 자꾸만 자신의 취약해질 몸을 ‘예감’했다. 기실 이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결국은 오르지 못한 몸이 있다. ‘나노 연기’ 파트를 맡은 지원이다. 지원은 항암치료 중에 있고, 이날은 몸 상태가 좋지 못하여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예정이란 거대한 실제 앞에 뒤틀리기 마련이고, 예감 또한 미지의 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내면 배신당한 것으로 감각되기 마련이다. 성선은 함께 준비하고 만들어온 동료가 결국 이날 공연에 등장하지 못했음을 울먹이며 얘기했다. 이들이 취약성을 잘 예감할 수 있음에도, 기대했던 근미래가 실현되지 못하자, 그 기대가 어그러진 현재로서의 ‘당시’는 어김없이 ‘복받치는’ 시간이 된다. 그럼에도 공연은 계속된다. 다만, 지원은 자신의 상태를 “무겁지 않게” 여겨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지원의 상태와 함께 지원의 요청까지 전하는 성선의 말로 인하여 이 무대에 ‘배어있는’ 페이션티즘(patientism, 환자주의)9이 보이기 시작했다. 취약한 몸은 계획이 달성된다는 것의 어려움을 쉽게 예측하게 한다. 그 미달성은 계획자를 괴롭게 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좌절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좌절하지 않는다는 말은 덜 고통스럽다는 것이 아니다. 기대와 계획의 실패가 예측의 실패가 아니게 됨으로써, 이 비틀려진 계획이 ‘실패한 성과’로만 가치 절하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 아프고 있는 몸들이 있다. 무대에 오르지 못한 몸이 있고(지원), 무대에 올랐음에도 무대에 대한 두려움이 뭐였냐는 질문에 어김없이 “아픈 것”을 떠올리며, 관객들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 또한 “아프지 않아서 다음 무대에서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몸이 있다(정민). 페이션티즘과 가까운 무대는, 극적인 시공간이란 것이 성패로 구별/판별되어야 할 박제된 시공간이 아니라, 아픈 몸들, 아플 몸들, 아팠던 몸들이 뒤섞여 몸들의 존재와 부재를 가로지르는 실존의 현장으로 읽히게 한다.
2. 내 몸 안의 타자, 자기 같은 타자
앞서 돌봄을 ‘의식적인’ 일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언제 어디서고 맞는 말이 될 수는 없다. 어떠한 돌봄 행위는 의식하지 않아도 수행 가능하다. 너무나 익숙한 관계나 상황, 장면 등에서 돌봄의 요함에 응하는 일은 의식하지 않고도 수행될 수 있다. 인간동물의 행위 외에도 비인간동물이나 사물의 존재 혹은 행위 방식 자체가 누군가의 취약성을 상쇄해주는 돌봄체로 여겨질 수 있다. 이때 주의를 요하는 것은, 행동과 사물을 반드시 의지가 깃든 행위 주체로 볼 수만은 없음에도, 돌봄을 요하는 이를 대상화하는 관점에서는 돌봄이란 것이 주체의 ‘의지가 다분히 반영된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책임의 소지가 명확한 어떤 행위, 즉 A가 주체라는 사실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라고 하여 반드시 그것을 A의 의지가 반영된 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예컨대 ‘어포던스(affordance)’를 떠올려보자. 뇌성마비 장애 당사자이자 소아과 의사로 일하며 자신의 재활 경험을 꺼내고 이를 분석한 구마가야 신이치로는 아야야 사츠키와의 당사자 연구를 통해 직접적, 물리적으로 상대방의 신체에 접촉하지 않고 행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 어포던스를 언급한다. 어포던스 개념을 적용하여 아야야10가 겪어온 상태 일부를 다음처럼 설명한다. “내발적인 의지가 일어나기 힘든” 상태로 지내고 있는 아야야는 자신이 한 선택이나 행위를 “자신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 안팎으로부터 비자발적 동의를 강요받은 결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11 한편, 구마가야 또한 다른 글에서 ‘신체 외 협응구조’로써 자신의 운동을 “주워줄” 사물의 존재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움직임이 무의미한 운동이 되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사물에 대한 술어로써 ‘줍다(拾う)’를 사용했다. 역자는 이를 “저자(구마가야-인용자 주)의 특정한 움직임에 대해 외부세계(사물이나 타자 등)가 적절히 반응한다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글에서 아야야의 행위에 대한 통찰과 구마가야의 움직임을 ‘주워주는’ 외부 세계에 대한 묘사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들의 이동과 운동이 그것의 주체 혹은 그를 돕는 사물이나 타자에 과도한 주체성이나 의지 개념을 투사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12
의식과 의지에 대하여 다소 길게 설명한 이유는, 돌봄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주체의 의지, 의사, 의식을 발견하려는 일은 도리어 돌봄에 대한 불충분한 혹은 그를 오도하게 만드는 관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선과 은선이 5장 ‘복, 붙’에서 주요하게 얘기하는 변의나 실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안의 타자’와 ‘자기 같은 타자’를 말해야만 한다.
성선: 여기 똥 안 싸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그래요, 나 번거로운 몸으로 태어나 혼자서 화장실 못 가. 그러나 당당하게 살아본다! 내가 원하는 특별한 자세가 있어. 아니 그렇게가 아니야, 아니 저렇게 요렇게. 각도가 안 맞아. 왼쪽, 오른쪽, 동서남북, 12시 방향, 주렁주렁 치렁치렁, 평생이 돌봄 팔자. 2명 붙여주세요. 아니 3명 붙여주세요. 아, 이럴 땐 누가 주도를 하는 거지. 서비스 내가 받는 건가. 내가 서비스 하는 거지. 돌봄이야말로 에셈플레이, 에셈플레이도 하루이틀, 너무 피곤해요. 은선아 니가 직접 말해 봐. 똥 걱정 없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나와 보라 그래. 나와 보라 그래! 나와 보라 그래! (13쪽, 밑줄-인용자)
[사진3] 5장 복.붙 성선과 은선의 공연 사진. 대사를 하고 있는 성선 뒤에 은선이 있다.
구마가야는 변의가 일 때를 “그 교섭의 순간에는 나와 장이 맺고 있던 협응 구조가 풀리면서 그 사이에 틈이 생기”고 “마치 ‘장’이라는 나와는 다른 인격이 나타난 것만 같다”13고 표현했다. 실금은 배설이 허락되지 않는 곳 곧 화장실 이외에서 배설이 일어나는 것을 이른다. 자신의 장과 교섭하듯 변의와 씨름하던 장면을 이야기하는 이는 구마가야뿐만이 아니다. 14 꼭 이동 장애를 가지지 않았더라도 실금을 겪어본 적 있거나 이를 두려워해본 경험이 있다면, 이렇듯 누구나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장을 ‘타이르듯’ 말을 걸어본 적이 있지 않을까.
성선의 대사는 자신의 배설에 타인의 조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그 조력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선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하는 즉 타인의 행동을 나의 주도 아래 배치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가리킨다. 본디 배설이란 신체 내/외적으로 협응 구조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장의 연동운동은 신체 내 협응 구조의 흐름에서 비롯되고, 배설을 보류하기 위해 항문을 닫는 운동은 신체 외 협응 구조(사회 규범)의 흐름에서 비롯된다”.15 즉 배설은 내 몸 안팎이 ‘협응하는’ 구조로 작동되어왔던 것이다. 성선과 은선이 배설 조력을 필요로 하는 몸으로 살아갈 때 자존심 상하지 않으려 내뱉는 말(“똥 걱정 없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그리고 돌봄과 자존감의 공존을 위하여 엄마에게 배운 노하우에 대한 언술(“엄마에게 배운 항문관리. 서로 봐주자, 항문”)은, 내 몸이 할 일을 해주는 타자(배설/실금조력자), 나에게 협응하지 않는 내 몸(장)을 드러내준다.
사실상 어떤 생애도 돌봄 없이는 영위될 수 없다. 또한 돌봄은 어떤 공적/사적 시공간에도 결코 멈추어진 적이 없다.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잘 돌봄을 잊는다. 돌봄을 잊는다는 말은 곧 ‘의존적인 개인’을 잊는 일이다. 개인이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게 된다면,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교차적이고도 유동적인 취약성을 ‘개인만의’ 이슈로 만들 수 있게 된다.
[사진4] 1장 기억집착 미진과 상미 공연 사진. 상미나 녹색뜨개실을 가위로 자르고 있다.
<주렁 치렁>의 무대에는 반짝이는 은색 오브제들을 덮은 녹색 뜨개실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뜨개는 이들이 추리 중인 돌봄에 대한 이들의 잠정적인 결론 즉 “‘나의 것’을 ‘새로운 경이로운 것’이 되도록 연결하고 공유하고 지어나가는 균사들의 촘촘한 망”17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는 이들의 추리는18 미진과 상미의 말처럼 “엉키고 또 풀고”를 반복할 것으로 보인다. 이 듬성한 추리는 서로를 옥죄는 혹은 스스로를 가두는 돌봄의 결말들을 잘라내고, 계속하여 돌봄의 장면들을 기워내어 복수형의 자기들을 돌보며 사는 일의 누빔점들을 파생해나가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가, 동시에 석연한 기대가 뒤엉켰다.
- 이 문장은 엄밀히 말하면 언제나 참일 수는 없는 문장이다. 뒷부분에서 이 문장에 대하여 조금 더 설명해나갈 것이다.[↩]
- 여기서 사용하는 ‘돌봄제공자/돌봄수혜자’는 피셔와 트론토의 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이 용어의 한역 표현을 사용하면서 우려스러운 것은 마치 돌봄이 돌봄제공자의 능동성과 주체성에 의하여 돌봄이 일방향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피셔와 트론토가 돌봄의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듯이 돌봄은 제공자의 제공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돌봄의 필요를 감지하는 caring about(관심돌봄), 필요를 충적시켜줄 집단 내 책임 공유 caring for(안심돌봄), 실질적인 돌봄 제공 활동으로서 care-giving(돌봄제공), 돌봄노동을 받은 존재의 반응이 발생하고, 그것을 판단하고 관찰하는 단계에서의 care-receiving(돌봄수혜), 나아가 돌봄필요와 그것이 충족되는 방식이 모든 이를 위한 정의, 평등, 자유에 대한 민주적 기여와 상통하는 단계로 caring with(함께돌봄)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돌봄이 돌봄제공(의존노동)의 측면만 부각되어서는 그 개념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제공/수혜’에 대한 용어를 고정하여 사용하는 대신 여러 표현으로 나누어 사용한다. 자세한 내용은 조안 C. 트론토, 『돌봄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옮김, 박영사, 2023 참조.[↩]
- “우리는 고통과 같은 감각 경험을 통해서 피부에 대한 감각을 지니게 된다. 이때 피부는 신체 표면으로, 우리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으로, 내부와 외부, 안과 밖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으로 감각된다”(65쪽). “고통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게 된다”(70쪽). 자세한 내용은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시우 역, 오월의봄, 2023, 65~70쪽 참조.[↩]
- 고쿠분 고이치로·구마가야 신이치로, 『책임의 생성』, 박영대 옮김, 에디토리얼, 2025, 118쪽.[↩]
- 앨리스 웡,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 김승진 옮김, 오월의봄, 2024, 15쪽.[↩]
- 물론 공연자의 어떤 어려움들은 이 무대 위에서 극적으로 해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문장은 여전히 그들이 각자 가장 의식하고 있는 취약성들이 해소된 것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그것이 의도적인 연출이든 아무리 대비하고 조율했음에도 통제되지 않는 것이었든)에 집중하며 작성되었다.[↩]
- 돌봄추리극 <주렁주렁 치렁치렁> 대본, 극단춤추는허리, 2025. 4쪽(이후 <주렁 치렁> 대본을 인용할 때는 페이지 수만 기재).[↩]
- 화영 “서로 돕는다고 했지만, 나 도움받는 거, 너무 배어있나. (중략) 난 떠날 수 없어. 장애가 배어있으니까. 너무 배어있나?” (5쪽[↩]
- 아네마리 몰은 ‘정상성’에 복종하지 않기 위하여 페이션티즘, 즉 “질병에 걸린 신체의 예측 불가능성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이 우리의 실재를 이해하는 데에, 또한 우리가 실재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페이션티즘은 좋은 삶을 형성하는 방법과 그 실천이 “만성적”이라는 사실, 즉 “무언가를 하기로 결정하는 것만으로 실제로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 곧 “선형적이지 않은 경향”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페이션티즈에 입각한 돌봄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신체를 조율하고 존중하고 영양을 공급하고 심지어 즐기기까지 하는 문제”가 된다. 아네마리 몰, 『돌봄의 논리』, 김로라 옮김, 갈무리, 2025.[↩]
- 아야야 사츠키는 자폐스펙트럼 장애, 난독, 발성장애 등 다양한 발달장애 경험을 겪어왔고 이후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진단명을 받았다. 구마가야와 함께 ‘당사자연구’를 진행하며 자신이 일상에서 자신의 몸으로 살아오며 겪은 감각에 관한 어려움들을 자신에 대한 자신의 연구로써 풀어나간다. 자세한 내용은 아야야 사츠키·구마가야 신이치로, 『발달장애 당사자연구』, 유기훈·안병은·봉성균 옮김, EM실천, 2025 참조. [↩]
- 고쿠분 고이치로·구마가야 신이치로, 앞의 책 참조.[↩]
- 구마가야 신이치로, 『재활의 밤』, 조승미 옮김, 동녘, 2025.[↩]
- 구마가야 신이치로, 위의 책, 277쪽.[↩]
- 일례로, 최근 서울 대학로 이음센터에서 공연된 창작공동체 무적의무지개의 <똥 싸러 가는 길>(2025.12.18.~19.)에서도 퍼포머들이 변(의)과 대화하는 듯한 장면이 연출된 바 있다. 실금을 화제로 삼은 이 공연은 ‘변(의)’과의 대화, 또한 실금 에피소드 등을 당사자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 구마가야 신이치로, 앞의 책, 272~273쪽.[↩]
- 트론토는 돌봄이 왜 ‘민주적인’ 것으로 재배치되어야 하는지, 돌봄 관련 의제들이 어떻게 사적인(개인적인) 것으로써 할당되지 않아야 하는 것인지를 얘기한 바 있다. 특히 돌봄이 ‘젠더화’됨에 따라 생산형/보호형 무임승차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상술한 부분은 사실상 돌봄 없이 사회는 기능할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는 점을 잘 드러낸다. 이는 공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돌봄이 왜 돌봄으로 보이지 않는지 그 원인을 드러낸다. 자세한 내용은 조안 C. 트론토, 앞의 책 참조.[↩]
- 앨리스 웡, 앞의 책, 15쪽.[↩]
- 이번 공연은 중간 과정 공유회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진희 연출가는 이날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 프로젝트가 2024년 ‘몸눈치’의 정치를 유머화했던 웹드라마 <농담>과 연계되었으며, 제작사 반달과 함께 계속 발전되어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