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기본권을 장애인은 투쟁으로 쟁취해야 하는 사회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숨] 활동가 정의로
지하철 엘리베이터만 만들면 끝?
‘전장연의 불법시위는 비문명적…서울시민을 볼모삼아 무리한 요구를 해’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이하 이준석 대표)의 발언 이후로, 연일 여러 언론에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이후 21년째 목이 터져라 이동권을 보장하라고 외쳐왔지만 차기 대통령이 속한 당대표라는 주류 정치인은 비문명적인 관점의 불법시위로 호도하며 투쟁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그동안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단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장애인도 지하철을 탈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으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다. 수차례 왜, 무엇이, 어떻게 필요한지 요구하고 투쟁했지만 이미 92.3%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는데 무엇이 불만이냐, 시민을 볼모로 잡고 불법시위를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어느 누구도 장애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음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역사는 정권이 바뀌고 제도가 수없이 바뀌며 제도를 변화시키는 혹은 제지하는 투쟁의 맨 앞줄에서 그 궤를 함께 해왔다.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의 개정을 위해 투쟁한 결과 지난 2021년 12월 31일, 저상버스 도입 의무화·특별교통수단 운영비 지원 내용 등이 담긴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개정안에는 여전히 단서조항과 미진함이 남아있다.
저상버스 의무 도입 대상에서 ‘시외·고속버스’는 제외되었고, 한 도로의 구조·시설 등이 저상버스 운행에 적합하지 않을 시에는 저상버스를 도입하지 않아도 되는 단서조항도 같이 포함되었다. 도로의 구조·시설이 운행에 적합하지 않을 경우 적합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운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역설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특별교통수단의 경우에도 기획재정부의 압박으로 인하여 국가나 도가 특별교통수단의 운영비를 ‘지원해야 한다’의 의무가 아닌 ‘지원할 수 있다’는 ‘임의규정’으로만 남아 의무 이행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공백을 남겼다. 이런 상황에서 지자체의 권한으로 예산이 편성되다 보니 지역 간 이동권의 격차는 벌어질 수밖에 없다. 특별교통수단 운영비에 국비 지원이 꼭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에 예산 편성을 위한 권리예산 투쟁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예산 없이 권리 없다’라는 구호는 지자체 상황에 따라, 의지에 따라 이동권이 달라지는 상황을 막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비문명적인 혐오 선동 정치에 굴하지 않고 함께 투쟁에 연대하는 사람들
이동권 투쟁은 단순히 이동할 수 있는 권리만을 말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삶과 직접 맞닿아있고 이는 교육과 노동, 건강 등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첫 걸음이 된다. 단순히 ‘이동’ 자체에만 방점이 있지 않다. 이동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머물러야 하는 존재에게 학교, 노동시장, 공적공간은 과연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가? 공공시설은 버스와 지하철을 타는 것조차 투쟁해야 하는 장애인에게 다른 권리들은 얼마나 굳건하게 닫혀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여전히 이토록 치열하게, 출근길 지하철을 타는 것이다.
철로 위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순간을 마주하면서도 20년이 넘게 지속되었던 이동권 투쟁은 20대 대선이 끝나고 차기 대통령이 취임을 앞둔 이 시기에 혐오 정치의 물결을 타고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게 되었다. 이준석 대표는 지난 12월 대선 유세 기간 동안 출근길 시위를 언급하며 장애인을 위한 특별교통수단이 부족했고 이동권, 학습권, 생활권 보장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최선의 노력’은 한 정치인의 말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정책과 제도, 예산배치로 노력을 증명해 내야 할 것이다. 그간 권력을 가진 많은 이들은 ‘노력’하겠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했다. 그 노력이 현실에서 실현되기를 이동권 투쟁을 하며 우리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올해 420 전국장애인차별철폐의 날에는 장애인권리민생 4법인 「장애인권리보장법」,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장애인평생교육법」, 「특수교육법」의 제·개정을 정책요구안으로 내놓았다. 이동권 보장과 더불어 장애인의 주거권, 노동권, 건강권 등을 명시하고 시설화를 철폐하여 탈시설 권리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이준석 당대표는 지난 4월 전국장애인거주시설이용자부모회 간담회에 참여하여 선택이 아닌 강요로 시행되는 탈시설 정책은 인권유린에 가깝다는 주장을 펼쳤다. 시설에 거주하는 이들의 욕구조사 결과 탈시설 욕구를 표현하는 이들의 비율이 적다며 탈시설 반대논리를 옹호하기도 하였다.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시설화로 고립된 장애인의 인권은 보고 있지 않다. 국가적으로 막대한 예산을 시설에 투여하며 시설화를 견고하게 한다는 사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시설에 들어갈 때 질문하지 않던 이들이, 시설을 나오려 할 때는 왜 이토록 집요하게 묻는 것일까? 지역사회에 머물 수 없는 구조, 활동지원의 부재와 안정적인 거주지의 부족, 여전히 뒤따르는 부양의무제는 한 사람의 독립을 제도가 가로막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년 신아원을 긴급 탈시설하였던 하늘님 사례에서 우리는, 수차례 시설과 서울시 그리고 여러 공적기관에서 ‘탈시설 진정성’을 질문 받았다. 시설에 거주하였던 1997년 진행된 심리평가서에도 적혀 있는 “시설에서 나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당사자 의사는 철저하게 묵살되었다. 시설사회에 대한 이해와 국가의 적극적 공조, 장애계가 탈시설을 하는 운동의 목적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탈시설 기본 권리 실현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을 지속한다.
매일 언론에서 이동권 투쟁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카메라를 통해 전달되지 않는 일상의 투쟁은 가까운 곳에서 현재 진행 중이다. 420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장애여성공감에서는 회원, 활동가가 함께 420 투쟁에서 어떤 정책요구안을 제시하고 있는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려운 단어와 문장을 풀어 설명하고 함께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420 투쟁에는 당연히 가야한다가 아니라 우리가 외치는 구호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더불어 회원들과 함께 투쟁 현장에 가기 위해 이동할 방법과 사람들을 함께 고민하기도 했다.
오랜 시설에서의 생활로 한글 사용에 어려움을 겪어 지하철을 혼자 타기 어렵고, 장애인 콜택시가 잡히지 않아 지하철을 타고도 환승이 어려워 다른 정거장에서 먼 길을 돌아오고, 발달장애인은 신체적 지원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장애인활동지원 시간이 적어 제한된 시간안에 이동을 끝마치거나 외출 자체를 제한하는 상황도 있었다. 함께 이동하기 위해 우리는 팀을 꾸리고 함께 이동한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활동가와 엘리베이터를 타면 안그래도 좁은데 휠체어까지 탄다, 더 탈 수 없고 시간도 지체된다며 불만을 얘기하는 사람들, 지하철을 타면 시위하는 거냐며 따가운 눈총을 주는 사람들도 있다. 420 투쟁에 함께 결합하면서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친 또 다른 투쟁 현장이었다. 집회를 가는 것부터가 왜 이 투쟁이 필요한지를 우리는 서로 몸으로 직접 만나고 있었다.
돈이 없다고 물을 마시지 말아야 할까? 우리에게 이동권은 그리고 이어지는 기본적인 권리들은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물이다. 민주사회를 표방한다는 정치인은 말하고 있다. 최대 다수의 불편을 야기해야 본인들의 주장이 관철된다는 방식, 서울시민의 출퇴근 시간을 볼모로 잡는 비문명적인 불법시위fmf 서울경찰청과 서울교통공사는 막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 반대편에는 매일 출근하기 위해 두 시간 먼저 일어나 장콜을 잡는 장애여성이 있다. 장애인 활동지원 시간에 맞추기 위해 외출을 최소화하는 장애여성이 있고, 오랜 침묵을 깨고 이제 막 지하철을 사용하기 위해 매일 아침 활동가와 함께 집에서 공감까지 지하철 타는 연습을 하는 장애여성이 있다. 여당의 당대표가 말한다. 승객이 특정 단체의 ‘인질’이 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 순간, 장애인 이동권 운동, 탈시설 운동의 패러다임은 순식간에 전복되었다. 장애인 vs. 비장애인으로 말이다. 정치와 권력은 더이상 투쟁이 왜 시작되었는지 어떤 해결안이 필요한지 논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혐오 선동의 정치를 하며 원색적인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다. 그 앞에 국민은 자격이 있는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으로 나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꺾이지 않고 온갖 혐오와 동정을 거부하며 투쟁한다. 매일 물을 마시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을 꾸리기 위해서 투쟁은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의 일상에 들어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