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번은 만난다
고나영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나는 장애여성이다
나는 장애가 잘 드러나지 않는 뇌병변 장애여성이다. 뇌병변 장애가 잘 드러나지 않는 걸 상상하기 어려울 수 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상상을 어렵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활동가다. 극단 춤추는허리와 함께 장애여성이 동료시민으로 살아갈 권리를 위해 같이 공부하고, 공연하고, 연대한다.
달리기는 못하지만 바람을 가르는 느낌이 좋아 전동휠체어를 타고 달리기도 하고 가족들과 분리된 공간을 가지고 싶어서 독립했지만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저녁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장애여성활동가로 계속해서 정체화하기 위해서 삶의 맥락을 되짚으며 모순되고 모호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들을 찾아 다닌다.
7살, 유치원에서 나만 실내화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있다는 깨달음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처음으로 인지한 순간이다. 1년 뒤 정상적으로 걷기 위해 특수깔창을 넣었던 운동화를 벗고 ‘훨씬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도록 수술을 했다. 수술 이후에도 절뚝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에 ‘쟤 걷는 것 장애인 같아’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학창시절 내내 걷는 연습을 했다. 노력은 어느정도 성과가 있어서 점차 걸음걸이로 놀림받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연습으로 숨길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무릎 바로 위에 있는 검지손가락 길이의 수술흉터이다. 치마를 아무리 늘려도 걸을 때마다 보이기 쉬웠고, 교복바지를 입고 싶었지만 여학생은 겨울에만 교복바지를 입을 수 있었다. 한 여름 체육대회 때 단체로 반바지를 입어야 했을 땐 급하게 흉터를 가리려고 살색파스를 붙였다. 집에 와서 보니 빨갛게 흉터가 부풀어올랐지만 누군가 흉터를 보고 ‘쟤 다리에 징그러운 저거 뭐냐’는 질문을 듣지 않는게 더 중요했다. 학교내에서 장애인이라는 것을 들키고, 소문이 퍼지면 무리에서 배제되고 소외당할 것이라는 것은 몸으로 직접 겪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장애인인걸 들키지 않기 위해 차별을 받아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굴고, 때로는 장애혐오표현을 함께하며 웃었다. 지금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있다가 비청소년이 되고 대학에 가면 자유로워질거란 위안을 하며 ‘장애’는 나에게도 언급하지 말아야할 이야기로 떨어뜨려 놓았다.
끝나지 않는 퀴즈
내가 장애인임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닌 동네와 거리가 먼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선생님들은 예쁘게 화장하고 꾸밀줄도 아는 친구들이 취업을 잘한다고 말했다. 꾸미지 않으면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에서 묘한 무시와 함께 뒤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행하는 화장품을 구입하고 결막염이 걸릴 때까지 써클렌즈를 끼고 다녔다. 여성으로서 느껴지는 차별의 감각과, 여전히 장애인임을 숨기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죄책감은 모두 내가 장애가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잠시 다녔던 대학에서는 장애학생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학과실에 장애인증명서류를 제출해야했다. 서류를 제출하고 나가려는 순간 ‘장애인 같이 안 생겼는데’라는 혼잣말이 등뒤로 꽂혔다. 조교의 말도, 쿵쿵 뛰는 심장소리도 못 들은척하고 과실을 빠져나왔다. 욱하는 마음에 ‘장애인 같이 생긴게 뭔데?’ 라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은 장애인 같이 생겼다는 표현을 차별이라고 말하지 못해서 욱했던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대상화하는 이미지들과 닮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는 것을 들켜서 창피함을 화가난 것으로 덮어씌우려 했던 것이다. 결국 장애인 같이 생긴게 뭐냐는 질문에 대답해야할 사람은 나였다.
대학 자퇴 후 ‘장애가 있으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 해야지, 장애인인데 고졸이면 취업하기 더 힘들어, 대학 다시 가야하지 않겠니?, 여잔데 다리에 흉터가 있어서 어떡해, 오래 걸으려면 평생 운동해야지’ 등 일상에서 걱정 섞인 압박과 차별은 계속 됐다. 그런 말이 혐오고, 차별이라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칭찬인데 왜 예민하게 받아들이냐, 걱정되서 해주는 말인데 버릇없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까? 나이어린 장애여성이 차별을 말 했을 때 다시 한번 차별받게 되는 상상은 너무 쉽게 그려진다. 배제당하고 싶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해 알아서 노력하거나 눈에 띄지 말고 가만히 있도록 요구 받는 환경에서 차별에 대해 말할 기회를 갖기는 어렵다. 용기내서 차별경험을 말해도 그게 왜 차별이냐고 되묻는 질문은 차별 받은 사람이 몸으로 겪은 차별의 감각을 의심하게 만든다.
동료시민과 차별을 배워야할 시간
장애를 숨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커져갈 때 공감활동을 시작했다. 장애여성으로서 겪은 차별 경험을 이야기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긴 금발머리, 공들인 화장, 온 몸에 힘을 줘서 만든 걸음걸이, 여성스러워 보이기 위해서 했던 노력들과 장애인 같아 보이지 않기 위해 해온 노력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장애여성동료들과 함께 몸으로 만날 때 장애여성 당사자임에도 장애차별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매일 활동을 해도 내재화된 차별을 찾아내는 건 여전히 불편하고 어려워서 회피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동료들은 몸으로 쌓은 자기경험을 기꺼이 나눠준다.
일상의 동료들과 차별금지법제정을 위한 국민청원을 위해 거리로 나갔다. 아이가 있는 동료와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시민,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시민과 지팡이를 들어 차별에 저항하자고 외치는 동료, 가던길을 멈추고 바람에 넘어진 피켓을 바로 세워주는 동료와 뒤돌아서 차별금지법을 설명하는 안내지를 받아가는 시민들을 보며 장애여성 동료들과 나의 정체성이 거리의 시민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들과 장애를 겪지 않았으면 몰랐을 장애여성이란 정체성과 차별을 통해 ‘소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내 삶으로 들어왔고 서로 연결되는 감각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될수록 알고 싶은 세계가 확장되는 즐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동료시민으로서 다른 위치의 차별을 드러내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일상의 구체적인 활동을 고민하게 된다. 차별을 배우면서 차별경험은 타인과 연결되어 세상을 바꿔나가고 싶은 힘을 만들어줬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민동의청원이 10만명을 돌파했다. 차별금지법이 일상에 닿을 때까지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포괄적차별금지법과 동료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닮아있다. 차별에 함께 대항하고 일상에서 아주 작은 변화를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한다. 서로의 삶에 교차되는 차별을 배우자고 말한다. 포괄적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차별을 말하는 근거로서 차별의 범위를 넓혀줄 때 사회는 세상에 풀어지는 구체적인 차별에 대해 배워야한다. 사회가 더 많은 차별을 배워나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겪는 차별을 고민하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 경험이 쌓여나간다면 더 이상 ‘모두를 위한 평등’은 형식적인 선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동료시민과 함께 평등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세상이 동료시민과 평등을 재해석하는 법을 제정해야 할 때다. 포괄적차별금지법 제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