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삶을 담은 무지개색처럼, 각각의 모습으로 인정받기
장애여성공감은 함께 배우고 경험을 나누며, 서로 지지하는 장애여성학교를 9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장애여성학교는 미술반, 음악반, 한글반과 장애와 여성주의반이 운영되고 각 반들은 올해 장애여성학교의 기조인 “반차별”과 “공동행동”을 각 반의 방향과 특성에 맞게 풀어내고자 합니다. 이 중 장애와 여성주의반은 다양한 운동은 반차별과 어떻게 만나는지 함께 배워보고, 복잡한 차별구조를 알아보며 우리는 운동과 일상에서 어떻게 반차별 운동을 해나갈 것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변화를 맞고 추동할 수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지난 5월 2일에 장애와 여성주의반 두 번째 시간에는, ‘성소수자 운동과 반차별’을 주제로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나영 활동가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를 통해 차별이 특별한 어느 약자, 소수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아래의 내용은 나영 활동가의 강의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생물학적인 것은, 근본이 아닌 사회적 산물
성소수자와 반차별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성소수자는 무엇인지, 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여정을 출발했습니다. 성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흔히 듣게 되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의미. 섹스(Sex)는 무엇일까요? 젠더(Gender)는 무엇일까요? 섹스는 생물학적인 성, 젠더는 사회적인 성. 이 공식과도 같이 느껴지는 답변은, 어느 강의에서든 ‘섹스가 무엇인지, 젠더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으로 듣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이 이 단어들에게 충분한 것이 아님을 강의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생물학적’이라는 말은, 타고난 것이다, 원래부터 그런 것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원래 가지고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태생적인 특성과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생물학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차이에 따라 어떤 것은 특정한 성별이 하기 어렵지 않냐, 또는 특정 성별은 어떤 특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당연한 것처럼 얘기되기도 하고, 배제와 차별을 할 수밖에 없는 과학적인 근거인양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물학적 특성을 구성하는 것은 사회적입니다.
남자는 여자, 여자는 남자, 서로 다른 성별을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는 게 자연의 당연한 순리이다.. 동성애 혐오세력들은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성별에 남녀만 있다는 것도, 남녀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들의 이야기처럼 ‘절대불변의 고유한’ 것이 아닌, 특정한 가치를 담아 구성된 사실입니다.
성소수자는 이성애자가 보편적, 정상적이라는 사회에서 이성애의 성적지향을 가지지 않은, 혹은 여성, 남성의 생물학적 특성이라고 이야기 되는 특징과 먼 정체성을 가진 사람, 또는 다른 방식의 성적 실천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성별이 남, 녀만으로 나눌 수 없고, 바이섹슈얼은 남자를 50, 여자를 50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것처럼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특정한 정체성만을 100%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정체성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서 나의 정체성과 성적지향을 고민할 수 있어야 하지만, 어쩌면 지금의 사회는 태어날 때부터 너는 특정 성별의 사람이고, 이성애자라고 지정된 채 자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지정을 내가 벗어나는 것도, 다른 사람이 벗어나는 것도 허용할 수 없는 일인것처럼 학습되며 자라면서 정상성의 범주를 고민하기 어려워집니다.
혐오의 종착지, 세계 멸망
‘동성애 반대합니다.’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는 동성애는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고, 비윤리적이고 비정상이라는 흐름이 담겨있습니다. 생물학적이라고 얘기되는 특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차별에서 구제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질병을 전파하는 사람이고 비윤리적이고 위험한 사람들이므로 차별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 이야기는 성평등과 양성평등에 대한 차이와도 연결됩니다. 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성평등은 위험하고, 남녀의 특성으로만 이야기되는 ‘양성평등’은 지향해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 됩니다. 양성평등은 남녀의 특성을 거스르지 않고 이루어지고, 남성은 성취와 성공을 해내야 하는 사람들로 이야기 되는데 그러한 남성성의 틀과 정의를 성평등 안에서는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제도변화로 동성결혼이 인정되고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나라에서도 교정강간, 여성살해 등의 피해가 이야기되고 있고, 이는 실제로 교정이 필요한 성적지향을 가지고 있느냐를 떠나서, 공동체에서 요구되는 규범과 이성애질서를 벗어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임을 나영님의 강의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역할을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 질서를 어지럽히고 종국엔 세계를 멸망시킬 존재로까지 연결되며 악마집단으로까지 이야기되는 사람들..제도적 변화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제도만으로 이러한 혐오가 뿌리 뽑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성이 생계부양자로 일할 수 있는 남성성, 여성이 그러한 남성 노동자를 만들기 위한 돌봄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구조들은 낙인. 차별과 연결되어 왔습니다. 남성 가부장에 의존하도록 만들어져 온 남성중심의 사유재산 상속의 역사성을 들으며, 자연에 대해 고정되어 있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세계멸망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이러한 구조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차별의 서사를 깰 수 없게 만드는 인식일 것입니다.
동떨어져 있지 않은 차별하는 자, 차별 받는 자
쉽게 깰 수 없는 혐오의 논리 속에서, 무지개 깃발은 한걸음 더 내딛을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 깃발의 6가지 색은 각각 삶, 치유, 햇살, 초월적 능력 등 일상과 삶에 대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고 합니다. 무지개 깃발을 통해 다른 삶을 꿈꾸는 민족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 커뮤니티가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반차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차별받는 존재와 차별해서는 안되는 존재가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사회 구조 안에서, 사회구조 유지를 위해서 말하는 편견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어떤 구조에서 연결되는 지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야 한다.” 나영님의 이 얘기처럼, 나는 차별을 받지도, 차별을 하지도 않을 사람이 아니라, 이 문제를 나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고민하는 것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일 것 같습니다.
인권을 보호한다는 것 만으로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차별하지 마세요’라는 말로 차별받고 있는 사람으로 고정되는 것에서 나아가, 반차별의 구조적인 연결고리를 만들기 다음 단계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적극적 연대가 필요합니다. 강의시간에 한 회원은 PPT 자료의 그림 마다 댓글을 달며 듣기도 했습니다. 각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과 표현이 존중되는 자리에서부터, 각 각의 삶이 인정받는 반차별운동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과정 안에서도 다양한 차별의 경험을 공감하며 다음 단계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들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