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천호동 소식 : 상호적인 – 협상하는 돌봄을 묻다
유진아(장애여성공감)
돌봄은 핫이슈이다. 그러나 이 돌봄은 추상적이지 않다. 천호동에 위치한 공감 사무실에서 우리는 장애, 퀴어, 양육, 노년, 질병 등의 다양한 삶의 조건 속에서 돌봄을 주고받고 행하고 있다. 이 돌봄은 선언에 그치지 않은 우리의 일상에서 비롯되며 정치적 해석과 위치성을 드러내는 것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장애여성의 경험을 드러내고, 이 경험이 의미하는 바를 함께 분석하고 얽혀지는 손끝과 온몸의 감각과 갈등 속에서 시도된다고 믿는다. 이것은 장애여성의 몫만은 아니며 장애여성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감각은 돌봄을 주고받는 우리 모두의 감각이기도 하다.
몇 년 전 <공감유머사진, 이게 웃겨?> 를 기획하며 공감은 장애를 가진 몸의 낯섦을 차별의 언어만이 아닌 다른 언어와 감각으로 엮어나가기를 바랐다. 뇌병변 장애여성이 팔을 올릴 때, 펜을 떨어트릴 때, 도와줘야 하는지 잡아줘야 하는지 애써 모른 척 해야 하는지…우리는 얼마나 갈등하고 무지했는가 이 관계가 얼마나 유쾌했는가를 흔들리는 당신의 동공을 부여잡고 “괜찮아, 나를 봐” 질문을 던졌다. 장애를 가진 여성의 낯설지만 이 낯섦과 당황스러움을 기꺼이 함께 겪고 관계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이었다.
24.천호동 소식을 통해 먼저, 돌봄의 일상을 드러내고자 한다. 돌봄을 주고받는 장애여성, 그리고 장애여성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돌봄의 감각을 우리의 일상에서 사유하고자 한다. 돌봄의 상호성 – 의존성 – 제도와 바우처가 담지하지 못하는 연속성을 세 꼭지로 이어가 보려 한다. 대단한 것은 없다. 단지, 날 것 그대로의 돌봄의 민낯을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슬로건 속에서 좁고 깊고 세밀하고 집착적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사진 1] 2023년 6월 웹소식지의 공감유머사전 이게웃겨? 첫 장면
상호적인(협상하는)돌봄
“(유치원에서) 꽃잎반 선생님 크게 불러야 돼. 그래서 목 아파. 휴지로 닦아주지.
00선생님은(시터선생님) 휴지에 물 묻혀서 이렇게 닦아줘. 물티슈는 막혀서 안 된대.
엄마는 물로 닦아 줘. 따뜻한 물로.”
사회생활 3년 차인 만 4세의 신변보조는 여전히 필요하다. 오줌은 연습을 통해 닦을 수 있지만 대변은 닦을 수 없다. 기저귀를 거쳐 스스로 변기에 앉기까지, 다년간의 돌봄을 받아왔던 몸은 신변보조가 일어날 때 장소가 어디인지, 그 장소에 누가 있는지에 따라 다른 돌봄이 발생한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안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돌봄이 발생하는 사회적 관계를 인지하고 요구의 기준을 조절한다. 즉 1.5대 20명의 아동을 케어하는 유치원에서는 본인이 대변을 닦기 위해서는 큰소리로 선생님을 부르고 휴지로만 닦을 수 있다는 것, 집이라는 공간에서 시터선생님은 물을 묻혀 부드럽게 닦아주는 것, 엄마는 욕조로 옮겨 따뜻한 물로 닦아주는 관계이고 이를 요구할 수 있음을 안다. 공간과 관계에 따라 다른 보조가 있음을 인지하고 관계에 따라 본인이 요구할 수 있는 돌봄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다.
돌봄은 일방향이지 않다. 위의 세 가지 형태의 대변을 처리하는 신변보조는 돌봄 행위자의 상황에 따른 결정으로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대변을 닦기 위해 상체를 숙여 엉덩이를 활짝 열어주는 것, 머리를 감을 때 두 손으로 눈을 감싸고 고개를 젖혀주는 것, 물의 온도를 말하고 짜증을 내는 것, 휴지가 아닌 부드러운 물티슈로 닦아주기 요청하는 것, 지금 내 몸을 돌봐주는 사람과 그리고 그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른 요구를 하는 것은(아침 출근시간에 바쁜 엄마가 욕조에서 닦아주려고 할 때 먼저 물티슈를 제안하거나 등) 돌봄 받는 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며 의지이다. “아냐 유치원 빨리 가야돼. 이걸로 닦아” 만 4세 어린이의 몸은, 그리고 돌봄을 받는 무수한 몸은 이 과정에서 사소하지만, 본인의 몸을 통제할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이 의지는 돌봄의 과정을 협상하는 과정으로 만들며, 결코 수동적이고 의존적이지만 않은 상호적인 돌봄/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선생님 많.이. 더.우.세.요?”
기존의 식습관에서 보다 더 건강한, 보다 더 신선한 식이를 도전하기 위해 토달볶(토마토달걀볶음) 저녁을 준비하려는 장애여성활동가의 웃픈이야기. 여기에는 몇 가지 협상이 필요하다. 첫째, 기존 활지사에게 자주 요구하지 않았던 ‘요리’라는 돌봄노동 요청하기 둘째, 토달볶에 들어가는 레시피의 순서를 나의 취향대로 ‘정확하게’설명하기(토마토를 처음 넣냐 달걀을 익히고 넣느냐는 다른 맛이니까) 그리고 셋째, 추가된 것으로 보여지는 노동+무더위에 불 앞에서 있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은연중에 표출하는 몸에 대한 지지/미안함/불편함을 표현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의 고민 등이다. 내가 먹는 음식을 바꾸거나 청소를 더 꼼꼼히 해보려 하거나 등의 일상의 자그마한 변화를 기획하는 것 모두 돌봄 받는 몸들은 관계 속에서 기획하고 움직인다. 매 순간 이 기획을 어떻게 실현케 할 것인가의 관계적 – 정치적 협상이 필요한 것이다.
협상은 성공하거나 결렬되거나 포기되거나 재도약의 기회를 노리며 여러 변수 속에서 관계를 변화시키고 갈등케 한다. 포기도 선택이라고 말하는 장애여성활동가의 이야기는, 밥에 현미와 보리를 추가해서 – 고압으로 눌러달라는 요청을 기획하고 협상해야 하는 돌봄 받는 몸의 고단함과 나의 에너지를 어디에 쓸 것인가를 선택하는 삶의 단면이기도 하다. 또한 협상이 떼씀과 훈육으로 교정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채택될 때 어린이들은 어떤 선택이 가능한가를 질문해야 하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는 마냥 노동권을 무시하거나 양육자의 훈육을 무시하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돌봄 받는 이들의 무수한 시도와 도전을 함께 사는 우리, 돌봄을 주고받는다고 말하는 내가 이 협상을 어떻게 응할 것인가의 대한 질문인 것이다.
오르내리는 시소, 평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상호성을 인식하기 : 갈등하는 돌봄이 취약성을 걷어낸다
돌봄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장애여성의 모습은 누구의 평가일까? 훈육은 돌봄의 어느 과정에서 누구에 의해 필요한가? 돌봄의 상호성은 물리적인 도움을 하나씩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두 주체가 함께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돌봄이 더 좋은 돌봄인가는 돌봄 행위자의 기준과 사회적 판단이 아닌 돌봄을 받는 몸과의 협상 속에서 시작된다. 이 협상은 치열하고 사소하고 치사하며, 또한 너무나 쉽게 무시된다. 돌봄 받는 몸들의 취약성은 이 협상을 인식하지 못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 같이 놀면, 같이 치워요
- 떼를 써도 예쁘게 말해요
칭찬 스티커를 통해 감정조절, 청소, 정리 등의 바른 습관 등의 훈육과정을 시도하려 했던 부모에게 아이가 제안한 엄마용 칭찬스티커다. 장난감을 정리하고 벗은 옷을 빨래통에 넣고 본인용 칭찬스티커란에 2개의 스티커를 붙이고는, “엄마 것도 만들어 줄게” 하며 동그라칸이 가득한 스티커장을 만든다. 그리곤 글을 모르는 본인을 대신해 적으라는 2가지 내용이었다. 분명한 요구가 담겨 있다. ‘화가 나도 소리 지르거나 때리지 않아요’라는 부모의 요구에 당신 또한 내가 화를 내는 순간에 예쁘게 말하라는 요구가 담겨있다. 정리 정돈의 중요성을 말하는 부모에게, 그 놀이는 같이한 놀이이니 당신도 같이 치우라는 요구가 담겨있다. 어처구니없다는 것이 심정이었으나 요청을 수용하며 함께 칭찬스티커를 만들어 나갔던 이유는, 장애여성활동가가 휠체어 뒤 가방을 닫지 않는 활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눈 날이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날 몸이 덜 피곤해서였다. 만약 그날 매우 늦은 시간에 집에 왔다면, 심신이 힘든 날이었다면 아이의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시도는 돌봄을 행한다고 여겨지는 부모에 의해 협상이 쉽게 결렬될 수 있다. 돌봄 받는 몸들의 협상은 수없이 시도되지만, 그 협상이 ‘협상’이라는 상호적인 관계로 가기 위해서는 돌봄을 행하는 사람이 이 상호성을 깨달을 때 가능하다. 그렇다고 이 상호성의 키가 돌봄을 행하는 자에게만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호성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와 돌봄을 행하는 몸이 가지는 권력을 인지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B는 나가도 잘 몰라, 그냥 산책 삼아 나오는 거예요”
VS
“00님 (휠체어)뒤에 가방 열렸는데요? 닫을게요!”
“아이고 또! 하아……우리 선생님(활동지원사)은 왜 이걸 못보실까요?”
두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 우리가 돌봄에서 상호성을 설명하기 어려운 점은 돌봄 받는 몸의 취약성이 아닌 관계의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관계의 어려움을 설명코자 할 때 돌봄 받는 이들의 취약성이 결과가 아닌 원인으로만 드러낸다. 상호성이 발휘되지 못할 때 너무나 쉽게 이 책임을 돌봄 받는 몸에게 책임을 묻는다. 의사를 확인하기 어려워서,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워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등등 돌봄을 행하는 관계의 책임과 무능을 묻지 않는다. 반면 모순되게도 이 책임은 한편으로는 기계적 자기결정권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00씨가 말하지 않아서, 00씨가 요청하지 않아서 등등 자신의 돌봄이 누락시킨 것을 당사자의 지시 없음으로 설명되는 형태이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아닌가? 공감에서 장애여성 섹슈얼리티 권리를 말할 때 피해이거나 선택이거나 하는 모순적이고 극단적인 선택권만이 있다는 문제와 유사한 장면이다.
결국 돌봄을 받는 몸들의 취약성은, 돌봄을 받는다는 위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아이라는 작은 몸이기에 장애를 가진 몸이기에 비롯된 것이 아닌 그러한 몸이기에 목소리와 의지가 쉽게 묻히고 외면되기 쉬운 탓이다. 그렇다면 취약성을 묻는 방향은 달라져야 하지 않는가? 왜 이 의지와 목소리를 듣지 않는가? 왜 끊임없는 협상의 시도와 의지는 은폐되는가?
돌봄을 이야기할 때 일방향성을 걷어내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방향이 젠더, 나이, 계급, 양육자, 노동자, 애정 등 다양한 위치와 감정 속에서 변동하고 상호적임을 인지하지 않는다면 돌봄의 갈등은 수면위로 올라올 수 없다. 갈등은 은폐되고 돌봄을 받는 몸-돌봄을 행하는 몸이라는, 취약한 몸을 돌보는 관계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이 관계는 양측 모두에게 위험하다. 그러나 장애여성을 보호하고 통제하는 방식의 관계와 제도는 이 상호성을 은폐하며, 드러나는 위험만을 조장할 뿐이다. 결과를 마치 원인인냥 설명한다. 공감이 오래도록 돌봄의 상호의존, 모두가 잘 의존할 수 있는 자립을 말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발현된다.
우리의 고민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돌봄은 노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노동만의 문제가 아니다. 취약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 취약성이 어디서 발현되는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다양한 몸들이 각자의 속도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는 상호의존의 돌봄은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왜 지원이 아닌 돌봄을 말하는 것일까? 대변을 닦는데 엉덩이를 열어주는 상호성 말고 다른 상호성은 또 무엇일까? 몸에서 전해지는 감각, 거절의 감각을 왜 외면하는가? 시간이 없고 협상을 포기하는 것은 누구의 몫으로만 남겨져 있는가? 이것은 왜 취약하다고, 돌봄이 더욱더 필요하다는 몸에게 더욱 강제되는가? 이 감각과 관계의 상호성을 우리는 발견하고 싶은가? 아이 노인 장애 등의 돌봄은 정말 다른가? 연이어 오는 질문들은 또 너무 먼지 같이 소소하고 복잡하다. 먼지 같은 질문을 가슴에 품고 또 다른 이야기들을 함께 나눠보려 한다.
[사진 2] 2023.03.31. 장애여성공감 2023 상반기 활동가 워크숍에서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투쟁 인간띠잇기 참여하고 있는 모습. 성별, 장애,연령, 퀴어 등 다양한 몸의 차이를 지닌 활동가들이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춤을 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