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돌보는 몸들의 저항, 기후정의 운동
유진아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끝없는 성장과 불평등이 초래한 기후위기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은 성장과 개발이 휩쓴 자리에 누구의 존엄과 생명이 위협받는지 명백히 보여준다. 지난 해 8월 집중호우로 인해 서울 관악구 반지하주택이 침수되어 발달장애인 일가족이 목숨을 잃었고, 같은 해 동작구 반지하주택에 거주하던 이도 본인의 집에서 목숨을 잃었다. 올 7월 충북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연이은 부산 지하차도 사고, 주로 70대 이상 노인 층에 집중된 온열질환 추정 사망자가 증가했다.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 속에서도 속에서 국가권력은 꿈쩍도 않고 국가권력의 오만함과 무능으로 버티고 있다.
지난 7월 18일,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기후변화로 인한 전세계의 천재지변’을 길게 말했다. 기나긴 연설엔 천재지변이 아닌 자본이 만들어낸 온실가스 대량 배출과 개발사업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2022년 4월 정부는 ‘1차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 에서조차 산업계가 감축해야 하는 온실가스 배출량 810만톤 면제, 재생에너지 비중 30%에서 21% 축소 등 기후위기를 막는 최소한의 의무 조치도 이행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에게 기후위기로 위험에 놓인 삶들은 그저 ‘천재지변’으로 인해 생긴 피치 못한 사고인 것이다.
미호강 범람으로 비롯된 오송 지하차도 사고는 기록적인 폭우로 인한 것인가? 강폭을 넓히는 교량 건설의 중단과 애초 설계와 다른 시공, 위험에 노출 되었을 때 사회적 안전망 작동 미비를 자연재해로 설명할 수 없다. 반지하 주택에서 발생하는 참사는 어떠한가? 빈곤계층이 머무는 대도시 주거환경은 자본이 안전을 침범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안전한 공간에 머무를 권리가 아닌 개개인의 능력 문제로 치부된다. 하루에도 몇 건씩 재난 안전문자가 오지만, 이에 대처할 지원체계는 없다. 지난 5월 31일 서울시에서 오발송하였던 ‘경계경보 발령’ 문자를 받고 휠체어를 이용하는 동료는 “이곳, 집에서 죽겠구나” 짙은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기후위기가 어떠한 불평등속에서 비롯되었는지 이에 따른 재난이 어떻게 불평등을 심화시키는지 차별 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피해경험이 보여주고 있다. ‘천재지변’은 이를 숨기려는 권력의 단어다.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주거와 공간, 몸, 자원을 갖지 못하는 이들은 능력껏 살아남을 것을 요구 받고 있다. 재난과 참사에서 목숨을 잃는 이들은 누구인가? 어떤 권리를 박탈한 채 자원은 배분 되는가? 누구의 권리와 안전이 박탈되는가? 날카롭게 질문을 벼리며, 각자도생의 시기 우리는 ‘천재지변’이라는 이름으로 재난이 설명되는 것을 거부한다.
[사진 1] 장애인거주시설 신아재활원 긴급탈시설 이행 촉구 천막농성이 진행되고 있다.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들이 요구사항이 담긴 피켓을 들고 있고, 뒷편으로 현수막과 천막이 보인다.
자본주의적 효율성을 위반하는 몸들을 감금하는 장애인 집단 거주시설과 기후위기
2019년 12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중증 호흡기 증후군 감염은 첫 사례가 보고된 후 곧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3년의 시간 동안 우리 모두는 일상의 변화를 겪었지만, 변화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청도대남병원을 시작으로 진행된 코호트격리는 집단거주 시설 안, 돌봄받기에 사회에서 배제되었던 이들의 안전을 가두었다. 2020년 12월 집단감염이 시작되었던 장애인거주시설 신아재활원 앞에서의 긴급탈시설 외침은, 추위를 뚫고 쇠사슬을 온몸에 감아야만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음을 말했다. 코호트 격리가 말하는 건 분명했다.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시설을 폐쇄하여 장애 있는 몸들을 포기함으로써, 시설밖 사회를 지키겠다는 메시지였다.
시설 밖 지역사회에 머물렀던 돌봄받는 이들의 일상도 무너져갔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에 직장과 학교, 공적 공간을 갖지 못하는 이들은 너무도 쉽게 고립되었으며 이 고립은 안전을 이유로 모든 관계와 일상을 중단케하였다. 돌봄의 공적 책임을 말하며 투쟁으로 만들어 낸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는 위기의 순간 또 다시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돌봄의 책임을 떠넘겼다. 2020년 6월 보건복지부가 <장애인 대상 감염병 대응 매뉴얼>을 배포하였지만 긴급활동지원 대안은 마련되지 않았다. 매뉴얼 속 활동지원사 인력을 사전에 확보해야 할 의무가 있던 시군구는 그 책임을 민간 장애인활동지원중개기관에 공문 한 장으로 전가하였다. 서울시 사회서비스원은 ‘자가격리자에 대한 긴급돌봄만 지원할 뿐 확진자에 대한 활동지원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결국 가족 이외의 모든 인력은 사라졌다. 가족의 부담을 담보로 하는 일방향적 돌봄이 아닌, 사회의 공동의 몫으로 만들어나갔던 돌봄의 권리는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2016년 메르스 시기, 공적 돌봄의 붕괴되어 집을 떠나 요양병원을 선택했던 장애여성의 모습은 2020년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밖에 없었다.
돌봄의 권리는 기후위기, 사회적 재난이라고 불리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던 시기 가장 먼저 무너진 권리였다. 혹은 가장 먼저 박탈되어도 되는 권리였다. 빈곤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반지하 침수를 겪으며 서울시는 긴급 대책을 내놓았다. 공공임대주택 이주, 보증금 무이자대출, 월 20만원의 바우처 지원 등 다양한 정책을 마련했다고 홍보했지만, 그 대상은 반지하 가구의 0.95%, 2,248가구에 불과하다. 여기에 더해 서울시는 우습게도 재개발 지역의 공공임대주택 공급비율을 15%에서 10%로 축소시켰다. 빈곤과 돌봄 받는 몸, 배제 당하는 두 존재를 대하는 정책은 동일하다. 안전과 생명을 저당 잡히며, 그 결과로 시혜적이고 단편적인 정책의 대상이 된다. ‘천재지변’ 속 약자로 위치 지으며 권리를 박탈했다는 사실은 은폐된 채 말이다.
기후위기 속 권리를 박탈 당하는 몸들은 장애, 노인 등 사회적 재생산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몸들만이 아니다. 팬더믹 시대에 국가 간의 장벽이 더욱 견고해졌던 양상을 떠올려보자. 백신의 분배는 인종 불평등을 조명하고 더 심화하였으며, 팬데믹이 초래한 고통 중 상당 부분은 예속되고 식민지화된 세계의 일부들과 유색인종 공동체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전혀 다른 층위의 권리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권리를 박탈 당하는 몸들은 재생산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몸들만이 아니다. 이 또한 허상이다. 이 체계의 유지를 위해 사회와 권력이 택한 속도와 효율성 속에서 배제 당하는 존재들은 늘 있다. 이 선택에서 밀려난 개발도상국, 인종, 빈곤, 장애, 젠더, 노인 등 다양한 층위의 배제의 존재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권리를 박탈 당하고 있다. 그렇기에 위기 상황에서 더 무방비하게 방치되고, 방치로 인한 복지/시혜의 대상에 다시금 서게 한다. 취약성은 이렇게 재생산된다.
기후위기, 시설사회 해체로 나아갈 길
시혜를 거부하며 위기에 노출된 몸들을 만나는 과정은 더욱 많은 권리를 박탈 당하고 동등한 동료로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가 누구였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사진 2] 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 취업박람회 ‘이것도 노동이다’에 장애여성공감 진성선 활동가가 발제하고 있다.
우리의 몸은 이 위기를 초래한 자본주의 생산체계에 응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 자본주의 체계에서 노동은 차별과 불평등으로 위계화 되어왔고, 그렇기에 불평등한 노동 현장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였다. 보호작업장이라는 보호의 이름을 띈 노동의 변두리와 기약 없이 청소, 재생산 업무 등 ‘미숙련’, ‘저가치’ 업무에 배치되기도 했다. 최중증-탈시설장애인의 권리에 중심을 둔 권리중심 맞춤형 공공일자리는 노동의 가치를 재질문하며 중증장애당사자들의 사회참여를 통한 노동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 작년 한 해 공감이 발달장애반차별투쟁단 만세팀과 시도하였던 ‘활동가연습’이 그러하다. 권리를 말하는 투쟁, 글쓰기, 발언 등 인권활동을 통한 사회 참여와 삶의 주도권을 만들어가고 실패해가는 과정을 노동으로 의미화하는 과정을 가졌다. 이러한 시도와 운동의 결과는 자본주의 생산체계에서 노동이라 불리지 못했던 몸들의 노동을 가능케 했으며, 노동의 가치와 의미에 재질문하며 기후위기를 가속화하는 자본주의 생산체계 – 성장을 주도하는 흐름에 새로운 물꼬를 트고 있다.
[사진 3] 2022년 923기후정의행진에 장애여성공감 회원들이 행진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평등하지 않다, 이제 사람을 살려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기후위기의 시대 팬더믹의 시기를 거치며 우리 모두는 질병과 죽음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질병과 죽음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어떻게 관계 맺는지 그 양상은 다르다. 폭염의 길거리를 배회하는 이와 휴양지 해변을 거니는 이의 ‘폭염’의 의미는 다르다. 코로나19 모든 활동이 중단된 거주 시설 안의 갇힌 몸과 비대면 회의를 참여하는 몸의 ‘팬더믹’ 시간은 다르다. 세계 주요 자원들의 상당수는 공정하게 분배 되어 있지 않으며, 그 세계의 그저 작은 몫만을, 혹은 그 세계의 이미 사라진 부분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들이 중첩되어 있는 수많은 세계들이 동시에 존재한다.¹ 동시대 중첩되는 세계 속에서 흩어지고 배제된 존재들, 각기 분투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의 삶은 그래서 중요하다. 각자도생으로 흘러가지 않겠다는 우리의 분투와 운동은 그래서 중요하다.
장애여성운동은 장애여성의 목소리로 돌봄받는 몸, 재생산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몸이 빼앗긴 권리를 드러낸다. 위기의 한가운데 또다시 파편적인 피해자/취약계층으로 위치지으며 제한적인 복지제도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최전선의 위기 앞에 놓인 몸을 통해 삭제된 권리를 말하며 우리는 이 위치성을 전복시키려 한다. 노동권 쟁취, 2001년 오이도 참사를 기점으로 시작된 이동권 투쟁, 1997년 에바다 투쟁을 통한 탈시설 운동, 성적 자기결정권의 박탈과 강간죄 개정운동 등은 그간 배제되고 권리가 삭제되었던 몸들의 권리를 쟁취함으로써 현재 자본주의 체제가 어떤 몸들을 배제하는가 묻는다. 질문에 직면케하며 불구의 몸들을 제외하며 불평등을 유지하려는 권력에 맞서왔다.
[사진 4] 2022년 923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장애여성공감의 단체 사진. 공감에서 만든 피켓과 현수막, 몸자보를 들거나, 입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해답은 불평등과 차별, 배제에 대한 저항이자 변혁일 수밖에 없다. 자원 없는 몸들의 안전과 생존의 권리가 사라져가는 현재, 권리의 상실을 ‘천재지변’으로 설명하는 이들에게 묻는다. 위기를 만든 이들의 책임은 무엇인가! 박탈된 권리, 배제당하는 몸은 어떤 구조에서 비롯되는가! 우리는 어떤 흐름을 뒤집어 나가야 하는가! 재난를 멈추기 위해 재난의 원인을 무엇이라 할 것인지, 그리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하며 멈추지 않으려 한다. 이는 권리가 파괴되어 가는 시설사회 속 주체들을 한 명 한 명 명징하게 드러내는 활동에서 시작될 것이다. 기후위기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서로 돌보는 몸들의 저항과 드러냄, 상호돌봄을 통해서만 멈출 수 있지 않을까.
¹. 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어떤 세계인가(창비,2023), 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