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천호동 소식 : 정상성을 뒤흔드는 상호적인 돌봄
유진아(장애여성공감)
[사진 1] 장애여성공감은 월별 생일파티를 한다. 생일인 활동가들을 축하하며 활동가, 회원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다.
정상속도를 허무는 돌봄받는 몸들의 연대
돌봄은 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사회에 필요 없다고 치부되는 존재들을 사회 밖으로 걷어 내는 과정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이는 사회가 어떤 몸을 원하고 어떤 인재를 원하는가와 연동된다.
“이건 어떻게 읽어? 나는 못 읽는데 내 친구는 읽더라. 이건 오윤아 할때 ‘오’야”
놀이터 미끄럼틀 위에 적힌 ‘올라가지 마시오’를 읽지 못하는 순간, 아이의 이야기였다. 이 짧은 순간 나는 아이의 작은 좌절, 친구와 대비되는 역량 없음을 빠르게 해석하며 또래와 뒤처지는 것이 아닌가, 한글을 공부시켜야 하는 타이밍을 놓쳤을까, 지금 시작하면 늦나? 방문 학습지 상담을 받아 봐야 하나? 등등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이어갔다. 정작 아이는 태연했다. 그러나 이 태연함보다 앞섰던 것은 양육자의 불안이었다.
혁명은 일상에서 길어 올려진다. 변화는 아주 사소한 순간에 시작된다는 의미다. 공감에서는 치열한 회의에서 논의들이 정리되고 활동의 방향이 결정되지만 풀리지 않는 이야기, 고민은 같이 먹는 점심식사나 간식 먹는 소소한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풀리기도 한다. 그날도 그러했다. 엄지와 검지, 중지에 고리를 끼우고 쓰는 연습용 젓가락을 사용하지 못하는 아이의 소근육 발달에 대한 불안인지 염려인지를 말할 때였다.
“오~ 나는 아직 젓가락질 못 하는데. 서유는 벌써 젓가락질하네요!!”
샤르코마리투스로 호명되는 지체장애를 가진 동료의 발언이었다. 밥을 먹던 모두는 다같이 빵 웃음을 터트리며 ‘이게 웃겨’ 소재라고 웃었다. 우리의 유머는 늘 그렇듯 서늘한 일침을 가지고 있으니까. 손가락 끝에 고무줄을 끼워 포크를 고정시켜 식사하는 동료. “진아 님 저 고무줄 좀 빼주세요!”라는 요청에 그의 손바닥에 올린 고무줄이 몇 개였던가. 그와 함께 밥을 먹을 때 느끼지 않았던 조급함을 왜 다른 공간에서 가장 애정어린 존재에서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끼는 것일까? 공포스러웠던 것은 성인 장애여성동료의 포크질에는 없었던 위화감/조급함이 만 4세 아이의 서툰 젓가락질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는 점이다. 발달과 성장에 대한 염려와 잘 자라고 있음에 대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불안. 그리고 정작 장애여성동료의 신변지원을 너무 자연스럽게 여기는 이곳에서의 내 몸. 이 간극을 마주하는 첫 순간, 공포로 다가왔다.
생각해 보건데 이 공포는 나의 뜨악한 양면성을 확인했던 순간의 감각이었다. 느낌표 두 개를 붙인 그의 농담 같은 발언의 의미는 다만 아이의 성장이 잘 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영유아 검사 시 평균치를 가까스로 넘는 또래보다 작은 키, 아직 교정젓가락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소근육 발달에 대한 불안, 통문자도 아직 익히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염려를 주저리주저리 말할 때 “아니, 벌써 혼자 불을 켜요? 난 아직 안 된다니까!”, “나보다 타자 더 빨리 칠 거야 걱정 안 해도 돼요. 우리보다 나음” 건네오는 이야기는 어쩌면 늘 명확했다. 다양한 몸, 다양한 속도로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고 실천하며 ‘정상 속도’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 있지 않는가. 걱정을 촉진하는 욕망은 너의 욕망이 아닌가? 그 욕망에는 어떤 기준과 바람이 담겨있는가? 더 빠른 속도로 아이가 어떤 삶을 살기를 바라는가? 장애여성동료의 속도가 용인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문제가 아님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무서운 질문이었다.
“이건 어떻게 읽어? 나는 못 읽는데 다른 친구는 읽더라. 이건 오윤아 할 때 ‘오’야” 이 문장에서 내가 나의 불안을 감추며 ‘올바른 성장’을 염려할 때, 동료는 양육자의 염려에 깃든 정상성의 기준-욕망을 읽어냈다. 한 문장을 두고 각자가 읽어 내려가는 것은 명확히 달랐다. 젓가락질 대신 포크로 밥을 먹는, 포크로 밥을 먹기까지 고무줄을 빼고 끼우는 과정에 돌봄을 요청해야 하는 장애여성의 관점. 숟가락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정상성’의 기준과는 늘 다른 힘으로 살아왔던 몸은 그 속도에 발맞추는 나에게 정면으로 질문하고 있었다. 당신이 바라는 성장의 속도는 누구의 기준인가? 누구의 욕망인가?
정상의 속도를 따르기를 요청받는 돌봄받는 몸 – 정상의 속도를 따를 수 없다고 여겨지는 돌봄받는 몸들은 시공간을 달리하지만 연대한다.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다. 돌봄 받는 몸들은 정상성의 기준이 각자의 몸에 내재되기 전까지 끝없이 질문하며, 자신에게 주어지는 ‘속도’에 저항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자연스럽게 인정하며 인정을 부정하는 존재에게 반문한다. 이러한 연대는 돌봄행위자/양육자라고 여기는 나에게 경계를 허무는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왜 지금 교정젓가락을 멈춰야 하는가? 왜 지금 한글을 알아야 하는가? 평균의 키는 어떤 의학적 기준에서 기인하는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함께 먹는 밥상 위에서 말이다.
삶에 스며든 차별을 마주 보게 만드는 돌봄
젓가락질을 고민하던 시기는 지나고 포크와 어린이젓가락 – 짝짝이 젓가락으로 그냥 스리슬쩍 지나갔다. 또래보다 작은 키는…모르겠고 한글 학습지는 시작했다. 반 친구들의 이름을 간판에서 한 글자씩 집어내는 이 시기가, 책을 혼자 읽고 싶어 하는 아이의 욕망이라 짐작하며 시작했다. 아이는 계속 배우고 실패해야 하는 존재니까. 나의 조급함을 투영하지 않되 배움과 실패의 과정을 잘 세팅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할까? 모르겠다. 다만 과정에서 내 불안, 욕망의 근원을 질문하고 잠재워가며 아이의 몸에 깃든 욕망을 다른 관점으로 읽기를 스스로에게 요청한다. 정답이 없기에 더욱 긴장해야 한다. 내 삶이 아니기에 조금 더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천호동 작은 사무실에서 우리는 몸을 맞대며 물컵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구부러지는 빨대를 꽂고, 왼편이 잘 들리는지 오른편이 잘 들리는지를 인식하며 휠체어와 속도를 맞추는 하루를 살아간다. 이 시간을 통해 비로소 ‘정상의 속도’, ‘차별’을 인식한다. 한글반의 간식 준비와 이동지원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십수 년의 공교육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지 못하는 장애여성을 ‘장애’ 때문이라 여겼을 것이다. 수학여행마다 학교에 남겨진 휠체어에 앉은 몸, 떡볶이 사 먹을 돈이 없는 텅 빈 지갑에 깃든 가족의 염려/통제, 올라갈 수 없는 카페 문턱과 식당의 계단 이동권의 한계를 체감하기도 하며, 건네지는 거친 욕설 속에서 비존중의 일상을 감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장애여성의 삶에 내재된 차별을 인식하는 순간이기도 함과 동시에 내 안에 숨겨진 차별을 끄집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장애여성동료가 가족과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을 봤던 기억이 난다. 그 가족은 보여지는 뒷모습만으로도 오가는 시선에 몹시 신경을 쓴다고 느껴졌다. 그 신경 씀을 의식하며 동료에게 다가가 인사를 할 때 나는 주변의 시선에 지지 않았다. ‘뭐야 진짜~’ 하며 주변의 볼쾌한 시선을 훑어내렸다. 오랜 시간 나는 이 순간을 활동가로서의 내 모습으로 기억했지만, 지금은 몹시 뜨악한 순간으로 기억한다. 가족과 동료의 간극. 인권 감수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동료의 삶을 내 삶과 언제든 분리할 수 있는 관계에서 비롯된 뒤틀린 감수성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서로가 경험하는 차별과 내재된 기준은 다르다. 이것은 별개의 문제가 결코 아니지만 실제 삶 속에서 뒤섞인 공통의 과제로 가져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이 어려움은 뒤섞이는 식사자리, 걷는 거리, 술을 먹는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관계맺는 보조와 돌봄 그리고 내 시간을 반추해 보며 내가 지닌 경계를 인식할 때 조금씩 희석되어 갈 것이라 믿는다.
사회가 말하는 정상의 속도와 방향은 홀로 저항하기 어렵다. 젓가락질만이 정상이 아니다고 말하는 식탁과 혼자 할 수 없는 신변처리가 물을 먹지 않는 근거가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소소한 돌봄의 관계가 그저 우리의 대안이고 자부심이다. 서로를 보살피는 돌봄의 과정에서 우리는 저항의 근거를 서로가 잘 축적하기 바란다. 우리가 저항해야 하고 변화해야 하는 지점은 거대한 제도와 정책뿐만이 아닌 지금 살아가는 몸들이 겪어내는 식탁, 화장실, 거리에서의 변화이다. 그렇기에 공감이 말하는 돌봄과 활동의 가치는 다만 선언으로 문장으로 갇힐 수 없다. “돌봄을 못 하면 활동가로 살 수 없다.”는 말이 농담만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