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월 웹소식지>공감 현장>의존과 연대를 통한 돌봄은 무엇을 의미할까?

의존과 연대를 통한 돌봄은 무엇을 의미할까? 

 

유진아(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돌봄은 추상적이지 않다. 장애여성공감을(이하 공감) 오가는 많은 몸들은 장애, 퀴어, 양육, 노년, 질병 등 다양한 삶의 조건 속에서 돌봄을 주고받는다. 입에 볼펜을 물고 타자를 치는 동료의 떨어진 펜을 줍거나, 포크로 밥을 먹는 동료의 요청에 포크와 손가락을 연결할 고무줄을 찾는 행위에서부터 언어장애가 있는 동료의 말을 통역하거나, 청년임대주택 신청 공지를 확인하고 자격조건에 해당하는 동료에게 신청을 제안하거나, 부모 돌봄을 고민하는 이에게 장기요양등급제도 및 지역기반 의료시설을 수소문해서 함께 찾아주는 등의 행위와도 연결된다. 돌봄의 시작은 타인의 시간, 삶에 관심을 갖는 것에서 출발한다. 상대가 필요한 순간을 캐치하고 서로의 지지망이 되어주는 것. 돌봄은 그런 의미에서 결코 선언에 그칠 수 없으며 취약한 서로를 바라보고 함께 대안을 찾는 일상의 관계에서 길어 올려진다. 

돌봄을 둘러싼 논의는 큰 틀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돌봄 사유화가 초래하는 젠더 불평등, 시장 자본주의의 흐름속에서 저평가 된 돌봄노동과 이주민/선주민으로 분화되는 불평등한 노동시장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다. 이때 논의되는 돌봄은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주요하게 이야기된다. 이는 곧 ‘돌봄’의 영역을 사회의 몫으로 인지하는 것과 더불어 불인정 노동의 가치와 평가를 재질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질문은 국가에게 돌봄을 사회복지정책으로 제도화한 운영체계를 ‘민’이 아닌 ‘공’이 주체적으로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공감은 이러한 방향성에 동의하는 한편, 돌봄노동의 가치절하가 돌봄받는 몸의 사회적 위치성과 어떻게 맞닿는지, 소수자 차별과 혐오의 구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야기해왔다. 동시에 이와 같은 차별이 돌봄이 갖는 다채로운 관계성을 삭제시키고 납작한 물리적 행위로만 이야기되는 것에 경계해왔다. 장애여성 운동 초창기부터 장애여성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며 자립을 불허받는, 돌봄받는 몸이 가정, 일터, 학교 등 다양한 삶의 공간-관계에서 필연적인 차별에 맞닥뜨리는 경험을 드러냈다. 이를 통해 구조적 차별이 제도에 어떻게 녹여져 있는지, 배제와 재생산을 정당화하고 초래하는지를 말해왔다.  

그렇기에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는 공감의 주요한 의제이다. 돌봄받는 몸으로 삶을 관통해왔던 장애여성의 경험과 감각, 갈등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가족관계에서 돌봄-보호를 이유로 기울어진 관계를 감수했던 순간, 활동지원사와의 갈등과 소통의 미끄러짐, 연애 관계에서의 불평등, 장애인활동지원제도 종합조사에서 한껏 ‘무능’을 드러내야 하는 찰나의 순간. 이러한 순간들은 일상의 관계에서 스며든 차별이 돌봄받는 몸들을 보호라는 이름으로 무력화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돌봄의 일방향성, 상호의존을 가로막는 제도와 사회적 인식을 확인하며 더 나아가 섹스, 자위, 피임, 임신 등 일상과 직결된 삶을 삭제하는 납작한 돌봄의 장면을 이야기한다. 이 글에서는 장애여성 운동의 경험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돌봄과 관련하여 고민해 왔던 몸, 관계, 제도의 이야기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1.독립을 가로막는, 돌봄받는 몸 : 우리는 왜 그렇게 몸의 이야기를 써내려갔을까?

기를 쓰고 무리해서 혼자서 밥도 먹고 화장실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 밥먹는 것, 화장실 가는 것을 못하는 사람은 무리 속에서 보호받는 의존적인 인간이고, 그런 것을 혼자 잘하는 사람은 독립적인 사람으로 본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가장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장애로 인한 의존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장애여성이 독립을 하고자 할때 주변에서 반대하는 이유로 흔히 ‘폭력’과 ‘재난/사고’에 대한 ‘안전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이는 장애여성을 독립적인 존재로 존중하기보다는 보호나 관리가 필요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안전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돌봄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아닌 개인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복지법 제 58조(장애인복지시설)의 장애인거주시설은 “거주공간을 활용하여 일반가정에서 생활하기 어려운 장애인에게 일정 기간 동안 거주 요양 지원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시에 지역사회생활을 지원하는 시설”로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시설과 가정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며 ‘일반 가정’에서 생활하기 어려운 장애인의 경우 시설이 가족을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함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권리’가 아닌 ‘능력’으로 접근하는 차별적인 전제이다. 이때의 능력은 돌봄을 받지 않고 생활이 가능한 혹은 돌봄을 대행할 가족이 있음을 의미한다.  돌봄을 이유로 사회에서 어떤 존재가 밀려나는지, 이 책임의 몫이 개인/가족에게 전가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장애여성은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받지 않기 위해 돌봄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거친다. 혹은 돌봄을 받아야 하기 스스로의 독립 가능성을 차단한다. 공감이 초창기 장애여성의 몸의 이야기에 집중하였던 것은, 내가 나의 몸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이것이 장애와 취약성과 어떻게 연결되어 나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낙인하며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지를 묻는 질문들이었다. 

 

“기준을 달리하고 그것을 바꿔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사회에서 자본이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조장하기 때문에 우리같은 사람들은 힘이 없어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형성해내는 구조가 문제인 거예요.”

“나는 글쓰기를 하면서 나의 몸에 대한 나의 생각이 기능적인 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나의 손에 힘이 없고 휠체어도 혼자 밀지 못하기 때문에 남에게 의존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나의 몸에 인간관계의 형성이 맞춰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내가 친구를 만나다면 ‘집에서 만나는 친구’, ‘나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는 친구’ 등으로 분류해서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이런 내 몸의 기준은 내가 누구에 대해 어느 순간에 어떤 감정을 가지는가를 결정하기까지 해요.”

                                                      <몸에 대한 자유로운 이야기 > 공감 창간호 대담 중 일부 발췌

내 몸에 대한 질문들은 태어나 처음 수영장에 가는 경험, 거울을 통해 보지를 보는 경험, 기울어진 척추의 뼈를 가지런히 만져보는 장면속에서 ‘할 수 없음’, ‘돌봄이 필요한 내 몸’에 대한 인식이, 기능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휠체어에서 내려오지 못하기 때문에 수영장을 갈 수 없음이 아닌, 굴곡진 내 몸-타인의 손을 빌려야 이동할 수 있는 몸-우악스런 탈의 과정 등 이 모든 ‘상황’으로 인해 수영장을 갈 수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의문들은 장애로 인한 할 수 없음에 대한 재해석을 불러왔다. 공감은 탈시설 운동의 적극적인 필요와 활동속에서 독립과 의존에 대한 질문 자체를 전복시키고자 했다. 돌봄받는 몸은 왜 독립할 수 없을까? 독립의 조건은 무엇일까? 돌봄은 어떻게 안전을 위협하는 장애의 ‘무능’과 이어질까? 이와 같은 질문을 넘어 보조를 주고 받는 행위, 의존받는 독립, 상호의존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때의 논의는 얼마만큼의 더 많은 돌봄을 확보할 것인가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의 의존을 가로막는, 내 장애를 부인하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질문으로 돌봄이 무능과 취약성으로만 결론짓는 사회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는 화장실 가서도 남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어떤 봉사자는 나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할 때도 있다. 그때 나 스스로 치유할 수 없다면 밖에 나오는 것이 자유롭지 않고 나의 의식도 좁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늘 경계하는 것은 나의 좁은 활동만큼 나의 사고도, 의지도 좁아지는 것이다.”

 

2. 당신의 시선끝에 누가 있나요?

돌봄은 시작은 무엇일까? 내 옆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춰야 한다. “당신의 시선끝에 누가 있나요?” 장애여성의 발언은 장애여성을 없는 존재로 여기는 사회에 ‘함께 살 의지’를 묻는 질문이다. 나와 함께 돌봄과 의존을 나누며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날카로움이었다. 그리고 사회, 타인으로부터 장애로 인해 숨막히게 받아왔던 ‘시선’에 대한 전복이기도 하다. 공감은 서로를 향한 관심 –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의 인정속에서 돌봄을 보호와 통제의 명분이 아닌 상호의존과 상호돌봄의 주제로 이야기해 왔다. 이런 고민속에서 어떤 몸도 일방향적 돌봄이 존재하지 않음을 2017년 il과 젠더포럼 <통제적 돌봄이 아닌 잘 의존하는 삶>은 독립과 의존의 관계를 재질문하였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와 도움을 주고 받으며 생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때론 서로에게 의지하고 의존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독립과 의존을 반대의 개념으로 보고, 무언가를 혼자 해내지 못하면, 독립적이지 못한 사람처럼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혼자서 밥은 할 수 있어?’ 와 같은 물음에 놓이게 된다. 비장애남성이 스스로 밥을 하지 못하더라도, 엄마나 배우자가 해주는 밥을 먹거나, 밥을 사먹는 것을 보고 독립적이지 못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장애여성이 장애특성상 하기 어려울 때, 그것을 하지 못하면 안되는 것처럼 이야기되기도 하며, 의존을 하면 사회에서는 나약하고 주체적이지 않은 것으로 본다.

 

독립생활 지원에서 중요한 것은 장애인이 노력을 통해 돌봄을 최소화하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연습시키는 것이 아니다. 독립과 의존은 대치적인 의미가 아니며 독립의 과정은 실패의 과정을 서로가 어떻게 지지할 것인가의 질문이었다. 삶의 전 시간을 필요로 하는 돌봄은 이 과정에서 실패를 지지하며, 의존의 공백을 메우고 타인과의 관계를 협상하고 갈등할 것을 전제로 이야기 된다. 이를 통해 거주시설이라는 분리된 공간이 아닌, 지역사회 안에서 함께 하루를 만들어갈 수 있는 구체적인 관계를 만들어낸다. 필요한 식료품을 빠르게 대신 사다주는 것이 아닌, 내가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먹고 선택할 수 있는지 거리를 걷고, 차근차근 수를 익히고 계산을 기다릴 시간과 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실패, 갈등, 재도전과 포기는 지난한 시간속에서 서로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 믿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질문하는 것은 어떤 몸만이 지역사회에 살도록 설계되었는가? 정상의 속도 – 삶 – 생애주기는 어떠한 기준에 의해 구획되어지는가이다. 이처럼 독립과 의존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돌봄을 특정한 존재만이 필요로 하는 것, 능력이 없는 이들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며 잘 의존하며 서로를 잘 돌보는 사회가 어떤 관계속에서 가능한가였다. 

 

활동보조를 받는다는 건 단순히 ‘몸’의 보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적 인식은 이용자와 활동지원사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스스로를 삶의 주체라기보다 그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나를 규정해왔다. 언제든지 몸이 보여 지는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인해 내가 원하는 걸 말하기보다 상대에 맞추려 했다. 보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신체적인 접촉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했고 ‘나 하나만 참으면 되는데…’라고 생각했다. 상대방에게 고마움을 모르는 ‘까칠하고 예민한’ 이용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완벽하게 세팅된 자리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관계를 맺고 싶어요.”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활보를 해줄 수 있는 게 있고, 해줄 수 없는 활보도 있었는데요, 그게 바로 화장실, 양치, 옷 갈아입기는 제가 할 수 없는 부분은 00님 활보님이 역할을 하지요. 하지만 제가 00님의 활보님께 돌봄을 받을 때마다 왜 나는 화장실이나 양치 돌봄을 못해주는 게 좀 한계라고 느껴졌지만, 그래도 잘하는 돌봄 중에 통역이 있어요. 외부에서 발언하시하거나, 외부 회의 때도 통역을 하지요. 그런데 통역은 무작정 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그 의미는 00님이 전달하고 싶은 말을 내 입을 빌려서 통역을 해주는 돌봄 기술이라고 하죠.

 

세 명의 장애여성이 말하는 것은 돌봄은 주고 받는 관계가 고정적이지도 일방향적이지도 않다는 점이다. 일방향적으로여겨지는 돌봄이 도리어 ‘돌봄’을 경직되게 만들며, 돌봄을 주고-받는 두 주체들의 관계를 굳히며 개별의 관계로 가둔다. 상호의존-상호돌봄의 관계는 양방향적이고 실질적으로 주고받는 돌봄을 말하며(장애여성이 중년의 활동지원사의 은행업무를 지원하거나, 화장실 지원을 받기 위해 서로 호흡을 맞추는 과정, 발달장애여성이 언어장애 동료의 말을 통역하는 것 등) 갈등하고 흔들리고 협상하는 돌봄관계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장애여성이 참여, 개입하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조건은 완벽한 세팅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명시적인 질문과 선택이 아닌, 권력이 흐르고 긴장이 핑퐁되는 몸의 이야기를 듣고 협의하는 경청과 공명의 관계이다. 더 나아가 이 관계를 함께 만들어 나가고 싶다는 상호간의 욕구와 협상의 과정으로도 읽힐 수 있다. 이와 같은 관계성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관계의 전복과 갈등속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에 맞춰가는 정상성에의 깨짐이었다. 돌봄을 둘러싼 관계성의 논의 돌봄받는 몸들의 취약성을 배태한 정상성에 대한 균열과 저항이었다.

 

3. 제도가 한계를 바로볼 때 돌봄공공성 논의가 가능하다  

서로를 돌보기 위해 어떤 갈등을 겪고 있는가? 돌봄을 꺼리고 의존을 민폐로 해석하는 감각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실제 주고받는 관계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논의가 돌봄공공성을 표방하는 바우처제도 구조 안에서 가능할지는 많은 고민이 든다. 장애계 투쟁의 성과로 2006년 시범사업을 통해 2011년 장애인활동지원법이 제정되었다. 시범사업 당시 장애 1급 중증장애에 한정되었던 대상은 2019년 장애등급제 폐지 흐름속에서 전 등록장애로 확대하였으며 시간 또한 월 40시간에서 국비기준 480시간까지 확대되었다. 이러한 제도의 변화는 2012년 활동보조인 퇴근 후 화재가 발생하여 사망하였던 故김주영, 故송국현의 비통한 죽음과 코로나19 돌봄공백과 활동지원시간 수가투쟁, 만 65세 이후 서비스 중단 투쟁속에서 가능한 변화들이었다. 그렇다면 2011년 법 제정 이후 15여년이 흐른 지금 장애인활동지원제도는 대상과 시간의 확대 이외 돌봄 받는 몸의 무능을 강화하고 상호성을 삭제하고 있을까?

2024년 4월 서울시는 ‘부정적 관행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장애인활동지원기관 재지정 심사계획을 발표했다. 활동지원기관은 이미 매년 지자체 점검 2회, 2년에 한번 국민연금공단 점검을 받고있다. 서울시의 재지정 심사는 이미 운영하고 있는 활동지원기관에 대한 ‘재’지정 심사를 추진하여 기관의 존폐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해당 재지정 심사는 활동지원기관의 관계법령인 ‘장애인활동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활동법)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서울시가 존폐를 결정하겠다고 하는 지정 취소는 장애인활동지원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인권침해 등의 중대한 위반이 3회 이상 누적된 경우에 가능하며 경고 및 업무정지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재지정 심사의 쟁점은 각 기관의 법정 인건비 준수여부였다. 재지정심사는 지자체의 근거없는 전횡속에서 보건복지부 수가로 충당될 수 없는 주휴, 연장, 연차 수당 등을 개별 기관인 몫으로 돌리며, 기관과 활동지원사의 관계를 노-사의 관계로만 규정하는 과정이었다.

 

의존과 연대를 통한 돌봄은 무엇을 의미할까?

장애여성공감 장애인활동지원 재지정 취소 대응 투쟁 경과 공유와 입장문 中

 

같은 해 4월 국민의힘 서울시의원들의 주도로 사회서비스원 조례 폐지 조례안이 통과되었고, 11월 1일 폐쇄를 발표했다. 효율성을 사유로 한 이유였다. 사회서비스원 폐지로 민간 중개기관에서 연계가 어려웠던 중증-복합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연계를 진행했다. 누구와 활동지원을 지속하는지 이관 과정에서의 문제는 없었는지는 개별 이용자들이 감당할 문제로 남겨졌다. 서울시사회서비스원의 폐지, 중개기관의 법정 수당 준수 등을 강제하는 현재의 구조에서는 최대한 많은 바우처 시간을 확보한 활동지원기관만이 법적 수당을 안정적으로 지급할 수 있다. 여타의 법적 다툼을 피하기 위해 중개기관들은 수당지급으로 노무상 문제가 될 수 있는 야간, 주말결제를 최대한 지양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장애인의 자립생활과 일상 지원을 담당해야 할 활동지원기관이 야간과 주말 결제에 대해 곤혹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이용인과 활동지원사의 부정수급 여부를 감시하며,  매주 활동지원사에게 업무보고로 출근을 요구해야 하는 위치가 된 것이다. 이런 위치에서 활동지원사 – 이용자간의 갈등과 돌봄과계의 경직성은 개별의 문제로만 설명되며 논의 자체가 되지 않는다. 저평가되는 활동지원사의 노동, 존중되지 않는 이용자의 의사는 활동지원 신청과정에서부터 이야기되어야 하며, 가족 및 지역사회 안에서의 이용자 위치와 젠더기반 돌봄노동의 문제는 연결되어 논의되어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기관의 몫이 아닌 일로 공론화 될 수 없다. 2016년 공감은 ‘알면서 ‘모른척, 당연했던’ 활동보조 이야기 : 장애인활동지원현장연구와 인권의제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제도에 포섭되지 않고, 이용자의 권리와 활동보조인의 노동권 중심의 기존 논의와 더불어 관계성, 돌봄의 상호호혜성을 주제로 고민을 던졌으나 확대될 수 없었다. 

 

우리는 활동보조현장을 통해서 돌봄노동을 이야기 하는 단위와 장애인운동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활동보조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성을, 그리고 상대적으로 제한성을 갖는 몸들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돌봄 과정으로 연결시켜야 함을, 마지막으로 활동보조과정의 어려움을 관계성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제도적 마련이 필요함을 이야기해야 한다. 활동보조현장에서 이용자와 활동보조인이 전달해주었던 경험과 말을 바탕으로 돌봄의 의미와 관계를 확장시키고 우리에게 필요한 사회적 조건을 구성할 수 있도록 리를 맞대야 한다. (장애여성공감,134p,  2016, <장애인활동지원 현장연구와 인권의제개발 프로젝트>

 

공공돌봄으로 이야기 되는 장애인활동지원을 운영하는 활동지원기관은 운영 책임에 따라 정부와 지자체의 관리를 받고 있다. 운영 책임의 몫에 따라 상호돌봄이 현장에서 지켜지고 있는지, 장애인 이용자의 돌봄 권리 확보를 위한 방안과 대안에 대한 모색이 아닌 부정수급과 노무행정의 권리주체 역할만을 수행할 것을 강제받는다. 이러한 수행위치에서 활동지원 현장에서 공공돌봄의 논의가 가능한지는 많은 어려움과 한계가 예상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활동지원을 측정하는 장애등급제 – 종합조사표가 갖는 한계는 여전히 유효하다. 2019년 장애등급제 폐지 흐름속에서 활동지원 심사는 인정조사 -> 종합조사표로 변동되었으나, 종합조사표는 여전히 기능제한(x1), 사회활동(x2) 접근성(x3)로 분류되어 있다. 가장 큰 점수 배점을 차지하는 기능제한(x1)은 국민건강공단 심사 조사시 장애인이 얼마나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가’를 증명해야 한다. 기저귀를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하거나, 앉지 않고 누워서 조사를 받거나, 인지가 떨어지는 척을 해야 점수가 잘 나온다는 웃픈 조언들이 등장하는 이유다. 돌봄 시간 확보를 위해 전략적으로 몸의 무능을 최대한 전시하고 강조해야 하는 제도의 시작점은 이 자체로 돌봄받는 몸의 위치를 드러내고 있다. 제도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제도가 돌봄받는 몸의 무능과 상호성을 어떻게 삭제하는지이다. 더 나아가 돌봄받는 몸의 상호성의 삭제가 공공 돌봄 현장에서 관계를 어떻게 납작하게 만드는지, 제도가 얼마나 시혜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돌봄공공성 논의는 시작점에 서는 것조차 어렵다.

 

4. 돌봄과 섹슈얼리티 

2025 셰어 후원파티 <No Stigma Party : 낙인 없는 세상으로 조이하셰어> 춤추는 허리 공연 中

 

“화장실 보조도 내겐 어려운 영역 중 하나였다. 성기를 닦는 보조가 필요한 경우에 냄새도 걱정되었고, 활동지원사가 ‘더럽거나 불쾌한 느낌’이 들진 않을까 두려움도 컸다. 활동지원사의 눈빛, 표정 등 비언어적 표현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해 과거에는 외출 시에 음식과 물을 거의 먹지 않았다. 대학생 때는 2박 3일 엠티 동안 보조하는 친구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체중이 늘까 봐 최대한 안 먹으면서 화장실을 하루에 한 번만 가기도 했다. 집에서도 혼자서 하는 게 내 자존심을 지키고 당당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돌봄은 무색무취가 아니다. 그럼에도 돌봄은 가사와 간병의 영역, 생존과 치료를 위해 먹고 자고 싸는(이또한 기저귀라는 대체제의 이야기만이 가능한)것 이외 다른 영역은 이야기하기 꺼려한다. 똥과 생리, 오물, 자위, 섹스는 중요한 삶의 영역이지만 돌봄받는 몸들은 무성적인 존재로 ‘알면서 모른척’ 없는 일로 냄새를 가리거나 사적인 영역으로 침묵한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이야기 되지만 국가는 오래전부터 우생학 논리를 기반한 인구정책을 통해 거주시설내 강제불임 및 피임, 안전을 이유로 한 성교육 등을 진행해왔다. 2020년 낙태죄 폐지로 실효성을 잃었지만 오랜시간 장애가 있는 몸의 임신중지를 타인의 의사로 가능케 했던 모자보건법 제14조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2025년 한 지적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는 생리혈 뒷처리과 성폭력 등의 위험을 이유로 피임시술을 권유하였다. 돌봄받는 몸들의 욕망과 재생산 권리를 안전을 이유로 통제하는 익숙한 방식이다. 

 

“긴장감은 관계가 친밀해질수록 그 경계가 조금씩 흐릿해지는데 특히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내가 몸을 보이는 것이 당연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몸을 옮겨야 하는 모든 일에 파트너의 보조가 필요하기 때문에 보조를 받는 위치에서 느끼는 고맙고 미안한 감정들은 관계를 주도하기 어렵게 만든다.”

“욕조에 한 번 들어가 볼까?, 아니야, 옷을 다 벗고 들어가려면 엉덩이랑 보지가 적나라하게 보일 거야, 그건 아직 싫은데, 의자를 이렇게 놓으면 나 혼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중략… 장애여성이 ‘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가득한 사회에서 내가 원하는 욕망이 무엇인지 찾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한 고민들이 끊이질 않았는데 내가 가진 정보와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제한적인 내 몸을 확인하거나 실패하고 좌절하지는 않을지, 그 과정이 나에게도 파트너에게도 ‘로맨틱’하지 않다면 의미가 없는 일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물론 상상과 현실은 차이를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내 몸은 의존적이지만, 나는 의존적이지 않다. 아니 적극적으로 의존하고자 한다. 타인이 내게 의존할 수 있게, 늘 나 역시 의존에 익숙해지기 위해 연습한다. 장애여성의 글은 의존이 필요한 몸이지만 일방향성에 매몰되지 않고 적극적인 의존을 모색하기 위한, 의존적이지 않는 자신의 다짐을 말한다.  일견 모순적이게 보이는 의미는 돌봄의 다층적인 관계, 그리고 그 관계에서 삭제되는 영역과 분절되는 권리를 보게끔 한다.  올해 7월 <숨, 쉬는 몸 독립으로 의존> 이라는 제목으로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숨은 생긴대로 꼬인대로 독립수첩 전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해당 전시는 ‘느리게, 생긴대로 꼬인대로 살아가는 장애여성의 삶을 그대로 전시하고 싶다.’ 라는 주제로 몸, 돌봄, 독립, 섹슈얼리티, 노동, 동료관계 등 장애여성의 삶에서 뗄 수 없는 주제를 중심으로 독립과 의존의 관계를 질문하였다. 전시장에서 마주했던 기저귀, 생리대, 변기 등의 모습들은 “생리, 똥, 오줌, 침…. 더럽고 냄새나는 웬만하면 마주치기 싫은 것들, 어쩌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이 진실은 돌봄 관계에서 매일 일어난다. 이 수치심과 오염의 경험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질문하며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던 오염의 돌봄 경험을 이야기하며 주도적인 관계맺기의 과정을 전시했다.  

생리, 변기, 화장실 조력을 외면하는 시선은 탈시설을 불허했던 통제의 논리와 연결되어 있다. 갈등이 담긴 흔들리는 관계, 상호적인 갈등과 의존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순간은 장애인의 섹슈얼리티, 재생산 권리가 어떻게 삭제되는지를 침묵하는 차별과 연결되어 있다. 장애여성의 몸-섹슈얼리티 이야기는 돌봄의 논의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서비스 대상으로 제한된 자리에 정해진 역할만을 수행하기를 거부하며 실패하더라도 함께 실패하는 관계, 불편한 옆자리의 갈등을 이야기 한다. 돌봄은 취약한 존재들을 지지하는 관계망의 설계를 요청하며, ‘취약성’의 발현을 야기하는 기준선에 대한 문제제기를 가능케 한다. 이는 권력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경청과 감각의 이야기를 요청하기도 한다.

 

“우리는 취약성이 아닌 취약성을 만들어내는 정치를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취약성이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지를 질문합니다. 

우리는 돌봄받지만 보호받지 않으려 합니다. 의존하지만 주체적인 선택을 제한받지 않으려 합니다. 연결된 삶 속에서 정의로운 돌봄은 어떻게 실천가능한지를 고민하며 질문하려 합니다.”

활동소식

댓글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