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대상 성범죄 특수성 고려되지 않은 ‘도가니법’ 개악에 대한
장애여성공감 입장
지난 10월 28일 국회에서 일명 ‘도가니법’이라 지칭되는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이하 특례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그간 장애인성폭력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드러나면서 특례법 6조의 ‘항거불능’ 요건 삭제 등 다양한 특례법 개정안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금번에 모든 안을 대안폐기하고 법제사법위원회 대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본 개정의 주요 내용은, 장애인준강간죄 조항을 세분화하고, 처벌형량을 강화하였으며, 장애인 및 만13세 미만 아동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한 것이다. 개정 내용 중 무엇보다 장애인준강간죄 조항 세분화와 기존 ‘항거불능’ 조문 삭제는 언뜻 보면 기존에 존재했던 엄격한 법 적용 및 해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애여성공감은 본 개정 내용이 장애인 대상 성폭력 범죄 및 성폭력범죄 일반의 특성을 거의 고려하지 못하였으며, 성립요건만이 강화 돼 결국 장애인성폭력 범죄의 처벌은 물론 적용을 더욱 어렵게 할 거라는 데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진다.
먼저 기존 특례법 6조 ‘항거불능’ 조문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형법 상 성폭력 범죄는 크게 폭행?협박을 이용한 강간(제297조) 및 강제추행(제298조),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준강간(형법299조), 미성년자 혹은 심신미약자에 대한 위계?위력을 통한 간음 및 추행에 대한 죄(형법302조), (만13세미만의)미성년자에 대한 간음 및 추행죄(형법305조) 등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현행 장애인준강간죄는 (지적장애인 피해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애인의 경우 피해자가 ‘장애로 인하여 항거불능인 상태’에 있었음이 인정되면 폭행?협박, 위계?위력이라는 행위수단을 요건으로 하지 않거나 완화한 해석으로도 강간죄가 성립되는 예외적 조항이었다. 이는 성범죄와 장애인의 특수성이 종합적으로 고려된 특례조항으로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장애로 인하여 항거불능인 상태’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식이었다. 장애인의 다양한 특성 뿐 아니라 장애로 인해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아왔던 측면 등이 ‘항거불능’ 성립 요건에 포함되어야 함에도 법정은 이러한 요소들을 배제하고 매우 좁게 해석해 왔던 것이다.
이것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형법 상 강간죄의 범죄 행위수단을 해석함에 있어 피해자의 반항이 현저히 곤란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매우 좁은 범위의 폭행?협박, 위계?위력을 요구하고, 그것이 장애인성범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데 있다. 결국 (행위수단으로써) 폭행?협박, 위계?위력이든 ‘장애로 인한 항거불능’ 상태든 이 모든 것은 성폭력 상황에서 피해자의 ‘항거불능’ 상태를 입증할 것을 요하며, 그것도 매우 좁은 범위에만 한정된다. 그래서 장애인의 경우 폭행?협박, 위계?위력 요건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정도의 중증장애’ 상태를 요구하는 병폐를 낳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 단체는 그동안 강간죄 ‘최협의 폭행?협박설’의 완화가 시급하고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지점이라고 보았다. 현장에서 사건지원을 하며 ‘항거불능’ 상태를 해석함에 있어 피해 장애여성의 장애는 물론, 피?가해자의 관계적 측면, 피해자가 사회?심리적으로 놓인 상황 등을 다각도로 고려해 ‘항거불능’ 상태를 폭넓게 해석할 것을 끊임없이 수사 및 재판부에 요구해 온 것은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어떤 법이든 법 조문 자체도 중요하나, 그것의 해석이나 적용이 더욱 문제인 것이다.
본 개정 내용은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온 특례법6조 ‘항거불능’ 조문을 삭제했다. 대신 세분화된 조항들은 형법 상 ‘강간 및 강제추행’(제1,3항), ‘심신미약자 간음 및 추행’(제5,6항),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상태인 자에 대한 준강간 및 준강제추행’(제4항)을 적용했다. ‘유사성교행위’에 대해서도 ‘폭행?협박’을 행위수단으로 도입(제2항)했다. 동시에 각 조항은 형법상 그것보다 형량을 훨씬 강화하였다(제1항 위반 시 최대 무기징역에 처한다). 이렇게 됐을 때, 현행 장애인준강간죄에서 행위수단 없이 ‘항거불능’ 조항을 도입해 명목 상 장애인 대상 성폭력범죄의 특수성을 고려하고자 했던 취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을 뿐, 형법과 동일하게 각 조항이 행위수단을 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양한 장애인의 특성과 장애인이 놓인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행위수단 없이도 성적침해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 장애인성폭력피해자의 현실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이다.
특별히 개정 내용이 제4항에서 형법299조 준강간 및 강제추행 조항을 도입한 것은, ‘항거불능’ 요건을 완전히 삭제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립요건을 완화시켰다고는 더더욱 볼 수도 없는, 혼란만을 가중시킨다. 형법299조는 ‘심신상실’과 ‘항거불능’을 병렬적으로 나열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의 ‘항거불능’은 ‘심신상실에 준하는 상태’로 해석된다. 여기에 개정 내용 제4항의 대상은 장애인이므로 결국 피해자가 장애인이면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임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현행 장애인준강간죄에 대한 법원의 좁고 엄격한 해석, 즉 피해 장애인이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정도의 중증장애’ 상태임을 요구하는 병폐를 더 확고하게 재생산하는 것이다.
더욱이 각 조항이 모두 가중처벌로 구성되었으며, 최고 무기징역형까지 적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때문에 법원은 유죄를 선고하는데 더 많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처벌 강화’가 범죄의 발생을 줄인다고 생각하지만, 급등한 형량은 처벌 강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구성요건에 대한 더욱 엄격한 해석으로 귀결된다. 때문에, 본 개정 내용은 법의 강력한 처벌 아니면 전면 무죄라는 극단적 양극 현상을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
앞으로 장애인 대상 성폭력 가해자가 금번 개정된 법의 적용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행위수단이 얼마나 극악했는지 혹은 극악한 상황에 얼마나 저항했는지를 입증해야 하거나, 장애로 인한 ‘심신상실’ 상태에 있었음을 장애인 피해자가 입증해야만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장애인 성폭력피해자들은 또 다시 시혜적이며 동정적인 법 적용 및 해석에 기댈 수밖에 없다.
장애여성공감은 이와 같이 장애인 성범죄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치 않았음은 물론 장애인의 성적자기결정권 및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더욱 후퇴시킨 금번 특례법 개정 내용에 대하여 실망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1997년 성폭력특별법상 장애인준강간죄 조항이 신설된 후, 2007년까지 이 조항에 적용된 사례가 거의 없었으며, 2007년 이후부터 미미하게나마 법원 판례 태도의 변화가 있어왔다면, 금번 개정안은 또다시 10년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진정 보호법익으로 하는 입법과 법 적용을 위해 뜻을 같이 하는 단체와 개인들을 모아 싸워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