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성, 좀 다른 이야기는 더 없나요?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장애인의 성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이슈화됐다. 영화 <오아시스>/<핑크팰리스>/<섹스볼란티어>, <섹스자원봉사> 등에서 장애인의 성을 소재나 주제로 다루었다. 하지만 면밀한 분석과 다양한 관점의 토론보다는 장애인 성서비스에 대한 찬반론 중심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성서비스, 성 자원봉사라는 논의/합의 되지 않는 언어와 주장이 몰아닥쳤다가 사그라지길 반복한다. 사람들은 성서비스의 제공자와 수혜자 양쪽 모두 나와는 상관없지만그들의 성욕도 권리이기에 필요하다고 지지하지만, 그것은 장애가 있는 그들과의 분리 혹은 거리두기를 전제하는 주장일 뿐이다. 장애인의 성에 대한 이슈의 흐름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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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전 실존 장애남성의 삶을 영화화한 <세션 :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이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것과 영화를 넘어서 도전하고 변화시켜야 할 현실은 무엇일까?
 
마크가 보여주는 장애인의 성의 한계
신부님, 하고 싶은 게 죄가 되나요?’라고 묻는 주인공 마크는 중증장애남성으로 시를 쓰는 저널리스트다. 섹스를 경험하고 싶어 하고 연애를 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만 집중하는 사람은 아니다. 시를 쓰고, 지적이며 유머가 있어 본인의 매력과 장기를 관계에서 활용할 줄 안다. 그리고 섹스테라피스트(섹스치료사) 셰릴을 만나 자신의 몸을 만나고, 느끼고, 표현하며 성기결합 섹스를 경험한다.
 
그런데 만약 주인공이 장애여성이라면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누구에게 어떻게 표현하고 실현했을까(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욕망은 마크와 어떻게 같거나 달랐을까.
2010년에 장애여성공감이 장애인 성서비스 연구를 위한 유럽연수에서 만난 독일의 장애여성은 탄트라 마사지 업소를 통해 만난 여성에게 정기적으로 마사지를 받고 있었는데, 결코 (비장애)남성 마사지사를 선택하진 않는다고 했다. 남성과의 관계에서 폭력적인 상황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고 그에 대한 통제권을 자신이 갖기는 어렵기 때문이라고. , 대부분의 여성은 남성과의 성기결합 섹스에서 임신을 걱정하고 피임방법을 고민한다. 성적 착취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안전하고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권리, 상황을 선택하고 통제하고 주도할 수 있는 힘이 여전히 장애여성에게는 과제이고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장애남성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이것들은 중요한 문제로 드러나지 않는다. 또 영화에서 활동보조인들은 마크가 섹스세라피를 받을 수 있게 침대에 눕히는 보조를 하고, 세라피 과정에 대해 마크와 대화하고 이를 공유한다. 마크를 보조하는 것은 대부분 비장애여성인데 활동보조 이성 파견의 경우 발생하는 불편한 지점들에 대해서 영화는 크게 다루지 않는다.
 
유독 장애인의 성을 다룬 영화의 주인공은 장애남성인 경우가 많고, 주인공 장애남성의 욕망과 관점으로 서사를 구축한다. 그리고 비장애남성에게 허용된성적향유와 권력과 비교해 장애남성이 성적으로 차별받고 소외됐다고 주장하는데 이 영화도 그러한 서사와 논리를 따른다.
 
이렇게 이야기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입장은 달라지고 주장하는 성적 권리의 내용도 차이가 생긴다. 그래서 소외되고 차별받아 온 장애인의 성적 권리를 이야기하는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필요하다.
 
장애인의 성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킨 영화 VS 장애남성의 로맨스 성공 스토리
마크와 셰릴은 정서적 교감과 대화를 통해서 로맨틱한 관계를 맺으며 서로 사랑하게 된다. 둘의 관계는 섹스뿐 아니라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다양한 관계와 감정을 보여준다. 사랑이 시작될 때의 떨림, 상대방을 그리며 시를 쓰는 열정, 설렘과 고백, 연애와 데이트, 이별과 아픔의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섹스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싶은 보편적인 욕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며 흥미로워하는 것 같다.
 
그리고 셰릴과의 만남 이후 마크의 모습은 이전과는 달라진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병원에서 퇴원한 날 수잔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모습은 영화의 처음 활동보조인이었던 아만다에게 소심하게 고백하는 장면과 대조적이다. 셰릴과의 만남을 통해 관계를 맺고 발전시키는 과정을 마크는 경험했고, 그것은 이후에 파트너 수잔과의 만남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크의 로맨스를 완성시키기 위해 영화는 다소 무리수를 둔다. 서너 번의 만남으로 마크에게 급작스럽게 애정을 갖게 되는 셰릴의 모습, 처음 만난 수잔이 마크 집에 놀러 가겠다고 하는 상황은 다소 억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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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의 한장면 
 
그래서 이 영화가 장애인의 성에 대한 관계와 감정의 문제를 보여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장애남성의 로맨스 성공 스토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장애여성 조제가 주인공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에서 조제는 연인 츠네오가 떠나고 독자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결말을 맺는다.
마크의 결말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나중에는 마크의 장례식장에 사랑했던 3명의 여인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동휠체어를 운전하며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모습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영화는 달달하고 유머러스한 면이 있지만, 고전적인 로맨스 서사를 답습하며 다만 다른 몸을 가진 장애남성으로 주인공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하고 싶은 건 정말 죄가 될까?
마크와 섹스테라피스트 셰릴의 긍정적 관계를 보고 섹스테라피 도입의 필요성으로 논의가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휠체어에 누워 있거나 산소통에 둘러싸이지 않고 맨몸의 자신을 거울을 통해 마주하는 행위, 자신의 몸을 만나고 느끼고 표현하는 과정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치료사라는 전문가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행위인가는 의문이다.
 
또 마치 세션은 수업 단계처럼 이루어져 있고 최고목표인 삽입섹스를 향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불편하다. 한 세션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마크에 대해서 분석한 내용을 녹음하는 것을 보며, 장애인의 사생활이 걱정되면서 대상화되고 있다고 봤다면 너무 과도한 것일까. 마크와 셰릴의 로맨틱한 관계에 가려져 이런 부분은 크게 문제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장애인의 욕구를 단계화하고 도식화시켜 치료/치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결과적으로 장애인의 성적권리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가가 개입해서 섹스테라피를 제도화하고 전문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권리 확보라는 맥락에서는 타당해 보일 수 있지만 한계적이고 위험한 주장이며, 성적인 행위의 실천이 곧 성적 권리의 보장으로 이어질지 역시 의문이다. 또 서비스를 받게 될 권리 당사자의 주체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과연 확보가 가능할지 과제로 남는다.
 
하고 싶은 것은 죄가 아니지만 서비스로 이루어질 때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의 위치와 역할을 간과할 수 없고, 장애인의 성적권리 실현은 중요하지만 충돌할 수 있는 다양한 가치와 입장이 존재할 수 있다. 또 모든 문제에서 제도화가 능사 같지만 이것이 장애인을 치료받아야 할 대상, 혹은 서비스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기 쉬울 수도 있다.
 
다른 시도는 필요하다.
장애여성공감에서는 그동안 자신의 몸을 만나고, 긍정하며, 주체적인 성인식을 할 수 있는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장애여성캠프에서의 자궁방, 몸 그리기 워크숍, 욕망/로망 사진관, 성적 욕망과 좌절을 드러내는 프로그램 등이 그것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드러내고 욕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과정이었다. 이 현장에서 함께했던 장애/여성들은 누가 누구를 치료하려 하거나 분석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성적으로 충만한 자기 자신을 만났다.
 
우리는 이점에 주목하며 장애여성의 성에 대한 더 다양한 욕구와 목소리를 발굴하여, 장애여성 안에도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와 경험이 반영된 서사와 주장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노력들은 장애여성의 성적권리 담론을 만들 수 있는 힘과 내용을 주었고, 성적 욕망을 표현하고 실현할 수 있는 대안적인 방식을 고민할 근거가 되었으며, 권리의 개념에 한정되지 않고 장애여성의 에 대한 확장된 논의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영화에서 마크가 경험한 과정이 부럽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단순하게 섹스테라피가 필요하다는 정리보다는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만들고 도전해 보았으면 좋겠다. 장애인의 성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장애인이 성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치료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별 때문이다.
 
그러니 비장애/남성/이성애 중심적으로 구성된 사랑과 섹스 이야기에 도달하려고 하기보다는 이런 관점을 비판하며, 장애인의 경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이야기들과 로망들이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 노력은 권리와 그를 확보하기 위한 제도 마련이란 주장에서 이탈하여 장애인의 성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고민의 틀을 던져주게 될 것이다.
 
(이글은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에 대한 리뷰로 진보적 장애인 언론 http://www.beminor.com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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