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어둠을 뚫고 함께 나아가기–장애여성공감의 퀴어한 퀴퍼 참가기
진경 (장애여성공감 이사)
2014년의 기억
2014년을 떠올리면 무력하고 막막하다. 그 해 4월 20일, 420 투쟁을 맞아 시외버스 접근권 보장을 요구하며 고속터미널에 모였다. 캡사이신 물대포를 쏘아대는 공권력의 폭력에 저항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싸우던 동료들과 그 자리에 함께했던 집회 참여자들의 얼굴, 그리고 반대편에 서 있던 경찰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송국현님의 급작스러운 죽음 직후에 이어진 420 이었던 만큼 장애인들의 계속되는 사회적인 죽음에 대해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문형표의 사과를 받아내고자 그의 집으로 향했다. 출발을 하려던 그 찰나에 횡단보도 앞에서 바로 막혔다. 비통함과 분노로 가득했던 사람들은 우리의 이동을 막는다면 차라리 멈추겠다며 강남 한복판 도로를 점거하고 주저앉았다. 같은 날 저녁 팽목항을 망연하게 지키고 있던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분노의 기다림을 멈추고 이동을 시작하자마자 경찰에 둘러 쌓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시청 광장에서 진행된 송국현님의 노제 때도 엄숙하게 진행되던 분위기가, 광장에 운구가 드러나자마자 불현 듯 달려오는 공권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 긴장된 상황으로 돌변했다. 행진 때는 다시 차분한 분위기를 되찾았지만, 광화문 광장에서 고인과 가까웠던 동료들의 오열 속에 추모의 편지를 나누고 화장터로 이동하려던 순간,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 그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게 막았다.
끝도 없이 저지당한다는 답답함이 한계에 이르렀던 순간은 퀴어퍼레이드였다. 불법으로 도로를 점거하고 수 시간째 퍼레이드 행렬을 막고 있는 혐오세력보다 방송을 통해서 10차, 11회차, 12회차로 계속 넘어가도록 ‘불법 집회 해산 명령’만 반복하고 있는 공권력을 향한 분노가 훨씬 컸다. 그 해 11월 ‘서울시민 인권헌장’ 공청회가 열린 서울시청 별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공청회장을 찾았을 때 의회 밖에 가만히 대기하고 있는 경찰들을 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AIDS out, 동성애 아웃”을 외치는 그들. 인권활동가 한 명, 한 명을 특정하며 폭언을 쏟아 붓고,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상황에서 경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공공의 장소에서 이토록 극악한 폭력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러한 폭력의 아수라장을 멈추라고 우리는 왜 요구할 수 없는 걸까. “박원순 나오라”고 소리 지르며 서울 시장을 불러내야 하는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였다.
2016년의 순간
올해 420투쟁의 행진 때 한 바퀴를 돌고 공감의 참여자들은 ‘세월호 투쟁과 추모의 공간’에 잠시 머물렀다. 2015년 420때부터 적극 참여하게 된 발달장애여성 회원들과 올해 처음 420 투쟁을 경험하는 공감 사람들에게는 광화문 역사 안을 지키고 있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공동행동’ 농성장과 광화문 광장의 정서를 연결할 수 있는 순간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광화문역 안에서 농성을 시작한 이후 계속 늘어가는 영정 사진을 마주할 때, 언제든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갈 때 느껴지는, 그 비통함과 분노를 공유하는 마음이었다.
2016년 퀴어퍼레이드는 작년에 이어 시청 광장에서 진행되었다. 2014년 연말, ‘서울시민 인권헌장 투쟁’을 진행하며 ‘성소수자 차별 반대 운동’에 대한 시민사회 전반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낸 서울시청. 그곳에서는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투쟁이 진행 중이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사람들이 모인 퀴어퍼레이드였고, 장애여성공감에서도 최대 규모로 참석했다. 그리고 높게 쌓인 퍼레이드 장소의 안과 밖 양쪽에서,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 어느 해 보다 가시적으로 많이 드러났다.
우리들은 자유롭고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다가 행진을 시작하려고 줄을 섰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잘 움직여야 한다는 긴장감으로 대기하고 있었지만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원래의 행진 동선을 따라서 이동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 상황에 당황했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난감했지만 결국 다른 길로 돌아서 이동하다가 행진이 끝날 때쯤 합류할 수 있었다. 짧고 빠르게, 그리고 보다 흥겹게 진행된 2015년과 비교하면 다소 싱겁게 끝난 행진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을 모두 마쳤을 때 나는 가장 장애여성공감 다운 방식으로 행진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공감은 사회적으로 매우 취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관련 제도와 지원체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사회적으로 계속 알려왔지만, 동시에 제도가 쌓아올린 견고한 벽 안에서 느끼는 답답함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왔다. 우리에게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그 지원 체계 안에 갇혀 있지만은 않겠다는 것이 장애여성공감이 15주년을 통과하며 느낀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다. 그 날 우리는 경사로가 없어서 순간 멈췄고 한동안 어찌할지 이리 저리 움직이며 당황했지만 그러면서 새로운 코스를 발견했다. 우리끼리만 깃발을 흔들고 이동하니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모두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지만 부끄러움을 나눌 수 있을 만큼, 다행히 참여자들이 적지 않았다. 휠체어 동선이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 순간 차를 막고 도로로 뛰어들어야 했다. 그렇지만 거침없이 탈선하다가도 위험한 순간이 느껴지면 이동을 멈추고, 서로를 살피면서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분주했다. 준비된 큐시트 없이 움직여야 하는 즉흥극이자 공감에서 함께 이동할 때마다 벌어지던 퍼포먼스 같은 문화제, 거리에 나온 시민들을 상대로 의도하지 않았던 캠페인이 뒤섞인 순간. 계획하지 않았지만 행진이 자연스러울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몸의 언어를 끊임없이 탐색해온 과정에서 체득한 경험이었다. 계속되는 눈빛 교환과 바쁜 수신호, 서로를 살피고 배려하면서 각자의 특성과 차이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을 때 나오는 순발력과 적절한 역할분담으로 이뤄지는 조화로움. 즐겁고 아름다운 순간은 늘 어느 정도의 우연과 광기, 일탈…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감당할 용기가 합쳐져 만들어낸다.
공감에서 활동하면서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장애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드러내고, 가시적으로 드러날 때, 가장 잘 수용되는 것은 온정주의적 태도와 만날 때가 아닐까’ 하는. 그런 면에서 그 날의 행진이 더 각별했던 것 같다. 모든 무력투쟁이 폭력은 아닌 것처럼 공감의 유연한 대처능력은 가끔씩 상당한 투쟁력을 발휘한다. 많이 긴장했던 사람들에게는 평온하고 즐거웠던 행진. 그래서 그 직후에 올란도에서 들려온 소식이 더욱 슬프고 참담했던 것도 모두 우리가 몸으로 기억해야 할 감정인 것 같다.
돌아가되 가로지르기를 선택한 공감 행진의 하이라이트는 신나게 달린 명동 대로였다. 그 길 끝에서 행진 대열과 만났고, ‘보라 친구사이’ 트럭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탈주의 기쁨과 연대의 온정을 느낀 그 순간. 언제든 혼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더 열린 마음을 갖게 한다는 것. 우리 각자는 다른 그 무엇이 되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서로 간의 확인은 타인들과의 연대를 통해 깊어진다. 2016년 퀴어퍼레이드를 나중에 돌아보게 된다면, 아마도 한국 사회에서 장애의 퀴어함이 드디어 자긍심을 얻게 되었던 순간으로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제도적인 지원 체계 안에서 오랫동안 새로운 길을 모색했던 장애여성공감의 운동도 본격적으로 다른 방향을 찾아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도 겹쳐졌다. 즐겁고 행복한 기억들보다 어쩌면 비통하고 억울한 슬픔과 분노가 우리를 더욱 강하게 연결시킨다. 긴 어둠을 뚫고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빛이 바로 보이지 않더라도, 때로는 남아 있는 어둠 자체가 우리의 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