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 ②] 탈시설: 개인이 삭제된 삶에서 ‘탈’하기
이은지(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장애여성공감은 창립 20주년을 맞아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라는 슬로건을 제시하며, 사회운동 단체로서의 정체성과 지향을 다시한번 가다듬고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장애인을 비롯해 시대마다 불화하는 존재들을 차별했던 ‘불구’라는 낙인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불구의 존재들이 살아야했던 폭력적인 운명을 거부하며 이제 ‘불구’의 뜻을 다시 만들려고 합니다. 사회와 국가는 온전하지 못한 기능, 스스로 구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불구의 정치가 피어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처지에 있는 소수자들과 함께 정상성과 성장을 의심하고 의존과 연대의 의미를 다시 쓰고자 합니다.
[글 싣는 순서]
1. 낙태죄는 장애여성에게 어떤 의미인가?
2. 탈시설: 개인이 삭제된 삶에서 ‘탈’하기
3. ‘장애인도 아닌, 여성도 아닌’ 폭력피해 장애여성은 어디로 가야 하나?
4.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 선언문
5. 20주년 행사 후기
비리운영, 불법 감금, 폭행 사망…수용시설의 문제가 이슈화될 때, 흔히 폭력적이고 반인권적인 행동의 극치가 많이 이야기된다. 하지만 그것만이 문제일까? 당연하게 이야기 되어야 하는 일상적인 권리에서 배제되고 있는 사람, ‘삶’이 아니라 일회성의 외출이나 이벤트 같은 ‘체험 활동’을 통해서만 ‘나다움’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같이 살아가고 있다.
정상성을 강요하는 모든 곳이 시설
거주시설은 보호가 필요하다고 규정되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며 생활하는 곳이다.거주시설에는 중증 장애인, 홈리스, 탈가정 청소년을 비롯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기 어려워 누군가의 돌봄이나 보호가 필요하다고 규정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수용된다. 이들은 사회에서 ‘온전한 개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많은 경우 시설은 ‘집단거주’ 형태로 운영되며 그 안에서 개인은 개인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집단생활의 특성 때문에 내가 먹고 싶을 때, 자고 싶을 때 자유롭게 그런 행동을 하기 어렵고, 정해진 일정과 계획표에 맞춰서 생활할 수밖에 없다. 욕구와 사생활이 통제되는 환경이고, 개인생활에 대한 자유와 선택권의 부재는 시설 거주인이 시설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 생활 하고자 하는 큰 이유이다. 대규모 시설일수록 관리의 효율성을 위해 자율성이 억압될 소지가 많고,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선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시설을 작은 규모로 운영하면 시설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누군가는 관리가 필요한 사람으로, 누군가는 그들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 그리고 ‘관리가 필요하다는 근거’를 들어 누군가를 분리하여 특정한 공간에서만 살아가게끔 하는 것 자체가 시설이라는 공간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더 나아가 우생학에 근거한 ‘배제의 논리’가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깊숙히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은 장애인의 자립생활과 탈시설을 위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지역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장애여성은 보호와 관리가 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삶 속에서 통제받는 경험을 하면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이것을 구조적인 문제와 특성을 고려하기 보다는 개인의 의지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독립하기 어렵고 보호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왔다.
일상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활동보조 시간의 부족함, 경제적 기반의 필요성, 주거지원의 필요 등 지역사회에서 갖춰져야 할 것들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지역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은 제도와 환경의 보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또한 이런 여건이 필요한 것이 단지 조금 더 안락한 환경에서 생활하기 위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누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선택지와 결정권이 필요하다. 자원이 없고, 선택과 결정의 기회와 권한이 마련되어야 나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그리고 물리적인 독립만이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 관계적 독립, 심리적 독립 등 독립은 여러 차원의 고려와 고민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시설의 특성으로 대표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기 어려운 삶’은 사실 시설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의 삶이 아니고, 장애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이야기되고, 내가 관계 맺고 살아갈 사람들을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누구와 함께 살지 어떻게 살아갈지의 고민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보조가 필요한 일상생활에서 보조해 줄 사람을 선택할 수 없는 장애인, ‘결혼을 통한 이주’일 때만 ‘다문화 정책’에 포함되어 지원을 받는 이주여성, 가족을 떠나거나 가족에게 순응하는 관계 외의 선택이 어려운 청소년 등이다.
삶의 주체성을 위한 관계맺기와 존중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는 시설에 사는 장애인 뿐 아니라,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정상성’을 강요하는 공간 모두는 제한적인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설과 지역사회라는 이분법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경계하며, 안전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무엇이 마련되어야 할지 고민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음’을 넘어 불화하기
사회에서는 주류의 질서와 규범을 유지하기 위해 ‘정상성’을 강요한다. 누군가는 독립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누군가는 아이를 낳아야 하는 사람으로, 누군가는 노동이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등등 개인의 사회적 지위, 성별, 장애, 연령 등에 따라 특정 역할을 기대하고, 특정 역할에서 배제한다. ‘어쩔 수 없음’의 정당화는 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차별하는 것이다. 장애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시설에서 나와서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성이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 위험할 것이라고, 나이가 많기 때문에 보호가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차별과 혐오의 언어로 규정한다. 예를 들어 ‘혼자서 밥을 못하기 때문에 당신은 독립하기 어렵다’는 말은, 독립하기 어렵다고 규정되는 사람들에게 덧씌우는 핑계이다.
장애여성공감에서는 이러한 ‘어쩔 수 없음’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활동들을 해오고 있다. 다양한 목소리를 엮어 공감 잡지를 펴내기도 하고, 경험의 언어를 캠프에서 풀어내기도 했다. ‘장애여성들의 반란’이라는 이름의 자조모임, ‘억압된 천사에서 자유로운 마녀로’라는 캠프 슬로건, ‘발칙한 그녀들의 섹스스토리’라는 이름의 전시회 등 고정적 이미지가 아닌 모습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활동들은 시대의 맞춤옷을 벗어던지고자 하는 사람 모두와 연결된다.
정상성 중심의 ‘잘 사는 삶’의 기준을 넘어, 각자의 ‘잘 사는 삶’을 이야기 하고 싶다. 우리는 폭력의 피해자로, 불쌍한 사람들로 그려지길 원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으니까 안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들을 깨면서 사회적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시대에 불화하며, 각자의 살아가는 방식이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을 계속 만들어 갈 것이다.
기사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98758&CMPT_CD=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