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③] ‘장애인도 아닌, 여성도 아닌’ 폭력피해 장애여성은 어디로 가야하나?
양애리아(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장애여성공감은 창립 20주년을 맞아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라는 슬로건을 제시하며, 사회운동 단체로서의 정체성과 지향을 다시한번 가다듬고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장애인을 비롯해 시대마다 불화하는 존재들을 차별했던 ‘불구’라는 낙인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불구의 존재들이 살아야했던 폭력적인 운명을 거부하며 이제 ‘불구’의 뜻을 다시 만들려고 합니다. 사회와 국가는 온전하지 못한 기능, 스스로 구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불구의 정치가 피어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처지에 있는 소수자들과 함께 정상성과 성장을 의심하고 의존과 연대의 의미를 다시 쓰고자 합니다.
[글 싣는 순서]
1. 낙태죄는 장애여성에게 어떤 의미인가?
2. 탈시설: 개인이 삭제된 삶에서 ‘탈’하기
3. ‘장애인도 아닌, 여성도 아닌’ 폭력피해 장애여성은 어디로 가야 하나?
4.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 선언문
5. 20주년 행사 후기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켜야 될 사람이야, 제가 볼 때는. 그런데 방법이… 우리가 쉼터니 이런데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중략) 결국은 남편한데 데려다 줄 수밖에 없더라고요. OO경찰서에서 남편을 만나기로 해서 데려다 줬는데 그 자리에서 또 없어졌어요. 남편을 보고 도망을 간 거죠. (중략)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지난 해 장애여성공감 부설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는 서울시의 조사용역사업으로 서울시 내 폭력피해여성 지원기관의 장애여성 지원 실태를 조사하였다. 서울시에 등록된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그리고 이주여성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는 기관 중 상담소와 보호시설 등 90개 기관의 종사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초점집단면접을 실시하였다.
위의 사례는 초점집단면접에 참여한 한 이주여성 피해자 쉼터 종사자가 자신이 지원했던 피해자의 사례를 소개한 것이다. 당시 가정폭력 피해를 입고 쉼터에 입소하였던 이주여성이 어느 날 갑자기 공격적인 행동을 하였고 지원기관에서는 정신질환에 대한 두려운 마음에 병원에 입원을 알아봤지만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에서 결국 가정폭력의 가해자인 남편에게 연락하여 인계할 수밖에 없었고, 피해자가 도망을 쳐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가정폭력을 피해 도움을 요청한 그녀를 다시 가해자인 남편에게 돌려보내는 것 밖에는 정말 방법이 없었을까? 아니 그것이 옳은 일인가?
장애여성이라 폭력피해여성이 될 수 없다?
이번 조사를 통해 모든 폭력피해여성 지원기관에서 공통적으로 지원의 어려움을 호소했던 경우는 정신상 장애, 즉 지적장애, 발달장애,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는 피해여성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신체상 장애를 가진 피해자들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데 이는 지원에 어려움이 적다기 보다는 편의 시설이나 장애인의 활동보조 인력의 부족을 이유로 애초에 입소자체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는 폭력피해 장애여성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지원들을 지나치게 장애의 문제로만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실 위 사례에서도 그 여성의 공격적인 행동의 원인이 정신질환에 의한 문제인지 확인되지도 않았지만, 설혹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고 하더라도 그 여성이 지속적인 가정폭력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발병한 것이라면 그녀의 질병은 폭력 피해의 하나로 안전한 공간에서 적절한 지원을 받아야 마땅했을 것이다. 가해자인 남편에게 돌려보내는 대신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적인 행동이 ‘정신과적 문제’라고 인식된 이후에는 그녀는 더 이상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아닌 공동생활을 할 수 없는, 다른 사람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잠재적 가해자의 위치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피해자를 지원하는 체계 속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전국에 폭력피해 장애여성을 위한 보호시설은 성폭력과 가정폭력을 합하여 12개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많은 경우 장애여성들도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설치된 상담소나 보호시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번 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로는 장애인전문 지원기관이 아닌 지원기관들에서도 대부분 장애인 피해자들을 지원해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장애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교육이나 장애인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전문적인 슈퍼비전을 받아본 기관 종사자의 비율은 매우 낮았다.
따라서 폭력피해 장애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피해여성의 장애특성에 맞춰 지원하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에 대해 어렵게 느끼거나 마치 안 해도 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맞춰진 지원체계 안에서 장애가 있는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시도는 종종 내담자나 종사자 모두에게 부정적인 경험으로 남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부정적인 경험은 폭력에 대한 피해를 장애여성의 관점에서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장애인 전문 보호시설을 더 지어서 해결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지만, 문제는 현재 장애인 전문 보호시설에서도 정신장애나 중증의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는 피해자는 입소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신병원에서 또는 시설에서 한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함께 필요하다. 즉, 우리사회가 지역사회 안에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필요한 이유는 폭력의 피해자를 지원하는 현장에서는 피해자의 처절한 생존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폭력피해 장애여성이 가지는 교차적 정체성
장애여성공감은 지난 2002년부터 장애여성 성폭력상담소를 운영하면서 장애여성의 성과 젠더를 기반으로 한 폭력 문제에 대해서 집중하면서 여러 소수자 단체와 연대하며 반성폭력 인권운동을 해오고 있다. 장애여성은 남성중심주의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동시에 비장애 중심의 사회에서 장애로 인한 차별의 경험이 전 생애를 통해 교차하고 있다. 이러한 장애여성의 취약한 위치성은 특히나 젠더를 기반으로 한 폭력에서 다양한 형태로 피해에 노출되고 있다.
전 생애에 걸친 일상의 성폭력 경험과 더불어 원가족으로부터의 방임과 학대에서 시작해서 배우자 또는 자녀로부터의 가정폭력으로 이어지고, 빈약한 사회관계적 자원은 성매매 현장에서의 성폭력과 착취적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더불어 이주여성의 경우 언어나 신분적인 제약으로 인한 사회적 장애 등이 중첩되는 경우는 너무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즉, 장애여성의 폭력피해 경험을 특정한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이 어쩌면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폭력피해 장애여성은 장애가 있는 여성임과 동시에 폭력의 피해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폭력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지원과 장애에 따른 지원은 분리될 수 없고 이를 위한 지원체계나 정책 또한 통합적인 관점에서 마련되어야 한다.
장애여성공감은 끊임없이 한 사람을 장애인으로, 여성으로, 이주민으로, 쪼개고 분류하고 그래서 다름을 차별의 근거로 삼으려는 이 시대와 불화하고자 한다. 더불어 한 사람 안에 교차하는 다양한 정체성을 하나의 틀로만 재단하는 정상성에 도전하고 배제를 위한 ‘불구’의 낙인을 거부한다. 세상 누구라도 혼자서는 스스로 모든 것을 구할 수 없는 불구의 존재이기에 서로 의존하고 연대함으로써 누구도 소외되지도 차별받지도 않는 그래서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
기사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99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