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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천호동 소식 : 공공돌봄은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유진아(장애여성공감)


유난히 그이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널뛰는 지푸라기처럼 날라다니던 날이었다. 이른아침 일이 있어 늦는다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몇시간 모습을 감추었던 그이가 오후에 상기된 얼굴로 숨을 할딱이며 사무실에 등장했다.

“차라리 누워있는 사람이 편하다니!! 이런 멍멍이 같은 소리가 어디있나요!!!”

 

“참, 의사쌤이 샤르코마리투스 내 대에서 딱 끊어야 한다고. 나보고 연애하면 오라고 했는데 (얼음땡 1장 쌍둥이 콜라보 대사 중)” 이번 극단 춤추는허리의 공연 얼음땡으로 첫 데뷔한 그이의 장애는 샤르코-마리-투스이다. 유전성 신경병증이라 설명되는 장애를 가진 그는 동일한 장애를 가진 만 65세가 넘는 어머니가 있다.  만 65세는 제도에서 매우 중요한 기점이다. 국가가 고령인구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연령으로 만 65세 생일이 지나면 노인장기요양과 기초노령연금, 국민연금을 적용받을 수 있다. 이는 만 65세가 넘는 몸은 국가의 경제적·신체적·사회적 케어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만 65세가 되면 장애를 가진 몸들은 제도에서 어떻게 변모할까? 장애의 진화 혹은 노화되는 몸에 따라 돌봄의 겹이 세밀히 덧대어질까?  다양한 방식으로 보완될 수 있을까? 예상하듯이 답변은 ‘아니다’이다. 노년의 장애여성은 ‘노인’의 몸으로 정체성이 변모하면서 장애를 가진 몸과 노인의 몸, 두 개의 몸으로 절단되어 등장한다.  2021년 장애인활동지원법의 개정으로  장기요양인정신청과 장애인활동지원 서비스 신청이 함께  가능해졌지만,  제도가 분리해 놓은 몸의 괴리감은 여전하다.  그이의 어머니 몸이 바로 그 제도가 말하는 공적 돌봄의 분절을 보여주고 있었다.


“센터장이 출동했다니까요!! 이런 일은 센터 생기고 처음이라고 참나.”

휘날리는 머리로 아침부터 어머니 요양보호사와 옥신각신 했던 그는 센터장까지 출동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요리며 가사며 이러쿵 저러쿵 요구가 많아서 힘들다, 누워서 운신을 못하는 몸이 차라리 편하다는 요양보호사의 이야기에 우리는 다같이 개거품을 물며 분노했지만 분노의 방향이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막연했다. 우리의 분노는 어디를 향해야 마땅했을까? 요양보호사? 노인장기요양센터? 활동지원과 노인장기요양을 동시에 쓰도록 제도를 설계한 보건복지부? 예산배정을 하지 않는 기획재정부? 모두 마땅했지만 또 마땅하지도 않았다.
낮에는 활동지원사가, 오후 어느 시간에는 요양보호사가 출근하는 노년장애여성의 몸, 똑같은 ‘나’이지만 아침에 나를 돌보는 요양보호사와 오후에 나를 돌보는 장애인활동지원사는 다른 역할과 목표 속에서 우리집을 방문한다. 돌봄노동자를 향한 비판이나 이야기가 아니다. 각각의 돌봄서비스(이하 바우처 제도)가 지향하는 바가 분명히 다르며, 이에 따라 돌봄 노동자는 다른 교육과 역할을 요청받는다. 이 괴리감속에서 여전히 나인 장애여성의 몸은 제도에 따른 돌봄의 상이한 성격을 수용해야 한다. 그날 분노의 오후를 보내왔던 우리들처럼 말이다.(물론 우리는 마냥 수용하지만은 않지만!)


함께 잘 의존하는 ‘우리’가 있어야 가능한 돌봄
사진출처: 비마이너,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63

[사진 1] 장애인권활동가가 피켓을 목에 두르고 있다. 피켓에는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 만 65세 연령제한 폐지하라, 만 65세 장애인에게 활동지원서비스와 장기요양서비스 선택권을 보장하라, 장애인활동지원 만65세 “현대판 고려장”까지’ 라고 적혀있다. 사진출처: 비마이너,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63

공적돌봄, 공공돌봄 그것이 무엇이라 불리던 사회적 제도로 만들어진 제도만으로 돌봄은 완성될 수 없다. 장애여성들이 바우처 제도에서 마주하는 무책임하고 개별이 감당케하는 돌봄의 공백은 어린 아이를 양육하는 나의 경험과도 맞닿는다. 어린이집-유치원의 돌봄교실이 제아무리 저녁 7시 8시까지 연장 운영한다 한들 아픈 아이를 맡길 곳은 없다. 2021년 봄 1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했던 나는 아프고 열이 오르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때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집안 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분투했다. 어린이집 연장교실, 아이돌봄서비스 그 무엇도 가능하지 않았다. 유일한 해결책은 부모인 나와 부모의 주변인인 조부모를 비롯한 사적관계망이었다.(시터를 쓰면 되지 않냐는…무책임한 발언을 하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 그 분투속에서 그 분투를 포기하지 않게끔 했던 것은 천호동 이 작은 공간을 채우던 동료들이었다. 늦은밤 이른 새벽 무거운 마음으로 오늘 가지 못한다는 텔을 올릴 때, 일정이 무엇이든 남겨진 일이 무엇이든 동료들은 나를 탓하지 않았다. 잘 돌보고 오는 것, 너의 건강도 잘 돌볼 것, 대안이 없으면 사무실에 함께 오라는 이야기들을 3년이 넘는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동료들이 착해서도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는 어떤 몸이던 서로를 살피고 돌보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은 개별의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고 그것을 실천하려 애쓰는 것이다. 그것이 장애여성의 몫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돌봄을 주고 받고 서로를 살펴야 함을 매일매일 확인할 뿐이다.

나야장애인인권교육센터 <돌봄과 지원사이>라는 워크숍에 참여해 함께 이야기 나누며 우리는 “만약 활동지원제도가 바뀌어 내가 원하는 만큼 24시간 지원이 가능하다면…내가 관계맺는 것이 달라질까?” 라는 질문을 나눈 적이 있다.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중증의 장애를 지닌 몸의 답변은 “아니다.” 였다. 사회적-공적돌봄이 말할때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은 제도속에서의 돌봄-복지제도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의 돌봄은 완전할 수도 – 주체적일 수있을까? 일차적으로 제도는 예산과 목적에 따라 시민의 몸을 분류한다. 그런 만행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늘 투쟁!!) 두번째 제도가 아무리 잘 설계된 들, 제도 안에서 우리의 몸은 우리가 몸담는 집, 노동현장, 학교와 길거리에서의 위치와 연동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활동지원시간이 24시간으로 늘어난들, 사회적으로 무능하고 항거불능을 증명해야 하고, 장애와 빈곤으로 인한 취약성을 나열하며 입증해야 하는 차별과 혐오의 고리가 계속되는 한 돌봄받는 몸의 위치는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천호동에 오밀조밀 모인 우리들은 서로의 삶의 무거움을 잘 나누며 활동을 지속하는 힘을 서로에게 길어오르기를 바란다. 돌봄의 상호성. 돌봄 받는 몸의 주체성은 개인의 역량과 자기결정 능력으로 가늠되지 않는다. 

 

우리는 늘 그 경계를 몰라 혼자 고민하고 갈등하고 죄책감과 무기력함에 빠지기도 한다. 잘 의존하는 법을, 늘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세웠던 사회에서 배우지 못한 탓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의존이 아니다. 의존을 하기 위해 나의 삶을 공유하는 것, 삶의 흠들을 자책과 결핍이 아닌 의존의 필요성으로 삼는 것을 실패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믿는다. 이 작은 사무실에서 주고 받는 돌봄을 통해, 어떤 몸이라도 나의 삶을 기획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여전히 겨울이다. 이 겨울의 한복판에서 온풍기는 고장나고 때론 빗물이 새기도 한다. 창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함께 견딜 수 있는 것은 함께 나눠 덮는 담요가 있는 덕이다. 두툼한 연대와 실패와 관계의 담요말이다. 


*천호동소식 돌봄이야기는 이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립니다. 또 다른 주제로 천호동의 복작거리는 소식을 들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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