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웹소식지>기획>돌봄을 받는 사람들의 독립과 관계에 대해

장애여성공감에서 ‘돌봄’을 고민하면서, 시설화된 관계를 넘어 서로 잘 의존하는 삶을 상상하기 위해 독립과 의존, 돌봄을 주고 받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글은 [돌봄민주주의x페미니즘] “청년 돌봄, 더 잘 돌볼 권리를 찾아서” 연속기획포럼 에서 발표하였습니다.

 

돌봄을 받는 사람들의 독립과 관계에 대해

진은선(장애여성공감 활동가)

나는 청년입니까?

나는 청년인가? 청년은 누구인가, 장애인은 청년으로 인정 되는가, ‘장애인 청년’이라는 정체성이 주는 낯섦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사회에서 말하는 ‘청년’의 범주는 법적으로 연령이 제한된, 비장애 남성으로 보편화되고 ‘열정, 도전, 능력’과 같은, ‘청년’이라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역할을 요구받는다. 청년들 스스로도 낯설어할만한 ‘청년에 대한’ 개념과 기대가 장애여성인 나 역시도 낯설다. 20대 장애여성인 내가 청년으로 정체화하지 못했던 것은 ‘건강한’ 신체중심의 논의에서 장애여성의 몸의 경험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말하는 정상적인 몸, 건강한 몸에서 벗어난 나의 몸의 경험은 오히려 나이듦과 통증에 가까워 노년의 경험이 더 가깝게 만난다. 그렇다면 나는 노년인가? 하나의 정체성으로 나를 설명하려 할때 한계를 느낀다. ‘청년’이란 호명을 세대로만 쉽게 묶을 때,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청년들도 이런 한계를 느끼지 않을까?

“저는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으니 휠체어를 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30대 초반에 틀니를 사용하게 됐거든요. 틀니가 노년의 상징이고 희화화의 대상이지만 저와 같이 지내면서 틀니가 그다지 낯설지 않게 된 거죠.” [1]30대에 틀니를 끼기 시작한 조미경은 이렇게 말한다. 30대 청년이 틀니를 할 것이란 쉽게 상상하지 못하지만, 그의 장애가 진행되면서 변화하는 장애여성의 몸은 노년의 몸의 경험을 만나게 한다. 그렇다면 이 진행은 진화인가? 노화인가? 장애청년은 이미 노화된 몸으로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 받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이 불가능한 몸은 무가치화 되기 때문에 국가는 보호와 안전을 이유로 시설에 감금을 정당화한다.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돌봄의 공백은 사회적 의제가 되었으나 시설이 재생산되어 온 역사는 돌봄이 사회적 권리가 아닌 효율성을 잣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독립의 자격을 묻지마라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지역에서, 가족이 아닌 국가의 역할로서 독립생활 권리를 요구할 때 국가는 시설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장애인거주시설을 사회복지서비스의 일환으로 막대한 예산을 투여하는 것은 장애인이 지역에서 나와 사는 것보다 사회적 비용이 적게 들 거라는 효율성의 논리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설에는 누가 가는가, 장애인복지법 제 58조를 살펴보면 장애인거주시설이란 “거주공간을 활용하여 일반가정에서 생활하기 어려운 장애인에게 일정 기간 동안 거주ㆍ요양ㆍ지원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시에 지역사회생활을 지원하는 시설”로 명시되어 있다. 정상 가족 중심의 사회에서 장애인을 가정에서 돌볼 수 없는 문제는 국가가 시설에 가족의 책임을 부여하고 ‘시설장’이 가부장의 역할을 대리하는 것이다. 즉, 시설 안에서 입소, 퇴소, 사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절차적 권한은 시설장의 승인없이 이뤄질 수 없다.

시설은 위계적인 관계에서 거주인의 관리, 감시의 역할로 일상적 통제가 긴 역사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개인이 삶을 요구할 수 없는 구조다. 장애여성공감은 올해 긴급탈시설 투쟁[2]을 하면서 당사자가 시설의 인권침해를 제기하고 탈시설 권리를 요구하였으나 시설과 지자체는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 진정성을 의심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제도 안에서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은 명시적 의미일 뿐 실제로 당사자가 의사표현과 결정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시설화는 지배권력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보호, 관리’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사회와 분리하여 권리와 자원을 차단하며 ‘불능화, 무력화’된 존재로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제한하여 주체성을 상실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3] 탈시설은 삶의 장소를 이동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관계를 맺고, 권리를 가지면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정의다. 시설은 점차 소규모화되는 형태로 지역에서 자리잡고 있다. 보호, 능력주의를 기반으로 개인의 삶의 모든 권한이 ‘운영사업자’의 있는 구조는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누가 돌봐야하는가, 가족 혹은 노동자가 이 역할을 수행할 때 이 관계를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정상가족중심의 제도와 돌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돌봄은 제도 밖에서도 동료시민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장애여성 독립생활운동(Independent Living)에서 ‘독립’이란 모든 일을 혼자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의존과 돌봄을 주고받으며 잘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어느 누구도 의존과 돌봄 없이 살아왔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회에서 어떤 이들의 의존과 돌봄의 권리는 독립의 자격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지, 성공의 가능성을 증명해야 하는지 드러내야 한다. 독립의 자격을 묻는 것은 사회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갈 자격을 묻는 것과 같다.

돌봄동료 관계를 맺고 싶다

비장애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장애인의 독립은 미성숙하고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여겨진다. 성별에 따라 다른 역할과 위치를 요구하는 젠더화된 사회에서 장애여성은 비장애여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에서 배제되는 것과 동시에 역할을 수행하기를 요구받는다. 이 때 장애여성의 독립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스스로 밥은 할 수 있는지’와 같은 질문에 놓이게 되며 ‘보호와 안전’을 명목으로 장애여성의 삶을 통제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장애여성들이 본인이 세대주로 있는 아파트에 가족의 주거를 제공하거나 가사, 간병 등의 노동을 수행하고 있으며 활동지원사와 파트너, 동료 관계에서 돌봄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돌봄에 대한 논의자체가 협소하지만 돌봄을 받는 이들의 경험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장애인활동지원제도는 장애인이 돌봄을 받는 위치에서 ‘미안하거나 감사한’ 마음으로 보조를 요청하는 것이 아닌, 권리로서 당당히 요구하는 것은 권리의 역사이다.

활동지원 현장은 국가가 돌봄을 제공하는 역할을 여성에게 부여하고 ‘경력단절 여성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정책의 의도가 맞물리면서 대부분 중년 여성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현장에서 만났던 많은 여성들은 누군가를 부양해야하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사회생활’을 하게 된, 즉 공적으로 관계 맺는 공간에서 노동해본 경험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활동지원사 개인의 삶에서 가치 있는 노동으로 평가받지 못한 가사, 돌봄 역할이 장애여성의 사적영역에서 수행될 때 ‘공적 관계 맺기’는 갈등과 긴장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활동지원제도는 장애여성으로서 독립적인 삶을 살기위한 필수조건이지만 내 삶이, 주변의 모든 관계들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크다. 그러니까 내 사적 공간과 관계에 활동지원사와 늘 함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좀 불편해도 억지로 몸을 움직여서 스스로 하면서 내 나름대로 돌봄을 거부한다. 내 몸을 잘 모르는 비장애여성 활동가 동료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활동지원사가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마냥 서비스 제공자/이용자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내가 활동지원사에게 의존하려는 것에 대한 긴장이다. 따라서 보조를 요청할 때 보여져야하는 내 몸과 ‘나이, 위치성’을 넘어 활동지원사와 평등해질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일은 일상의 관계를 바꿔나가는 과정이다. ‘엄마, 이모’가 아닌 호칭을 정하고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부터 시작하면서 ‘친밀한 관계’에 대한 경계를 놓지 않는 다.

장애여성이 자신의 몸과 필요한 보조를 설명하고, 성기를 닦는 것과 같은 밀접한 보조의 내용을 함께 맞춰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 “활동지원사와 몸이 닿는 감각이 최대한 느껴지지 않게 휴지를 3번 이상 돌돌 감아서 사용한다 던가, 방향, 횟수, 힘의 세기, 모양(톡톡 두드리는 것과 일직선로 쓱- 닦는 것의 차이는 크다) 등의 구체적인 보조를 협의해갔다.”[4] 장애여성 혹은 활동지원사 한 사람만이 모든 부담을 수용해서 괜찮아지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서로의 몸을 알아가고 배우면서 관계를 맞춰 나간다. 예를 들어, 체온이 다른 경우 문을 열 것인가 말 것인가,와 같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갈등의 원인이 된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는 5-60대의 여성이 경험하는 신체적인 변화가 체온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게 되었고 활동지원사는 혈액순환이 어려운 내 장애와 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만큼 치열하다. 물론 매일 직면하는 문제에 감정이 앞서거나 상대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그냥 넘어가는 순간이 존재한다. 관계에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을 알지만 쉽지 않은 이 관계를 잘 맺어가기에 많은 긴장을 필요로 한다.

사실 관계는 실패의 경험을 쌓아가면서 아주 조금씩 나아가도 또 제자리를 반복한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연대하는 것의 의미는 공적 관계 맺기의 경험이 없는 여성들이 경제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의미를 지지하면서 지하철을 타고, 은행을 가고, 주민센터에 가서 공문서를 작성하고, 여성/노동자의 권리를 말하는 현장에 함께 가는 것이 관계를 바꾸는 중요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돌봄 관계와 긴장에 대해

장애여성이 독립적인 삶을 살면서 돌봄을 주고 받는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 기대지 않는다. 활동지원사 뿐만 아니라 장애여성의 주변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연결되어 있다. 특히 장애여성의 연애에서 파트너는 존재만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데, 둘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할 경우 주변 사람들은 장애여성인 나의 위치를 상기하면서 파트너가 많은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애여성이 이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파트너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계속 갈등하고 협상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나의 역할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관계의 초반에 가장 고민했던 것은 ‘씻는’ 문제였다. 위생적으로 중요하지만, 보조를 요청하기 어려운 마음과 싫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예를 들어 후다닥 씻고 옷을 입고 있는 파트너와 달리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고 나오기까지 필요한 보조를 설명하고, 보조를 받는 모든 과정에서 옷을 입고 있지 않은 내가 불편했다. 내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고 파트너에게 보조받는 것을 최소화하는 것이 관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5] 파트너에게 보조를 요청하기 어려운 마음은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몸이 보여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동시에 그럼에도 보조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의도를 잘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 어렵지만 단순히 고맙거나 힘든 일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닌,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몸의 차이가 만드는 감각이 달라서 상대방의 반응을 고려하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내 몫이지만 결국 이 과정을 함께 감당할 때 익숙한 몸이 될 수 있다.

사실 당연한 말이지만, 파트너 이외에 다른 관계에서도 장애여성인 내가 첫 만남에서부터 관계의 주도권을 꽉 잡고 좌우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이 말은 앞으로도 내가 맺어야 할 관계는 지금처럼 치열하고 실패는 더 수두룩할 것이라는 의미다. “장애여성이 관계 맺을 기회나 조건이 너무 열악한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나은 관계를 만들 수 없을 거라는 불안함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맺는 이 관계가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고 합리화하거나 일방적으로 맞춰 주는 관계여서는 안 된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파트너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주변인, 활동지원사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기에 관계 단절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사실 안정적인 관계에서 돌봄을 받고 싶지만 장애여성으로 독립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외로움, 고독함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다. 친밀한 관계이더라도 다른 몸의 차이와 감각으로 내 생각을 온전히 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관계에서 주도권을 놓았을 때 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의존할 수 있지만  그 마음이 지속되는 것에 대해, 독립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현저히 적은 것에 대해, 매일 긴장하지 않으면 관계는 한순간에 기울 수밖에 없다.

나는 관계에서 ‘그 순간에 들었던 감정을 다시 돌아보고, 불편함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지 고민하고 전달할 말을 연습하기도 하고,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지, 이 관계에서 지키고 싶은 원칙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과정이 외롭기도 하고 매일 긴장하는 일상이 고되다. 물론 시도의 대부분이 실패가 예상되지만, 내가 이 과정을 겪어낼 것을 선택하는 것과 이 때 느끼는 고독함은 힘이 된다. 이 고독함에 대한 논의가 의존과 돌봄 관계 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뤄질 때 어떤 관계가 잘 의존할 수 있는 관계인지, 그 관계를 잘 나눌 수 있는 동료는 누구인지, 관계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가능하지 않을까.

 

[1] 조미경 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 인터뷰, 장애여성 공감’의 공동대표 조미경이 말하는 “장애가 있는 몸으로 늙어가기”,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2020. 09. 01

[2] 비마이너, ‘통장, 도장, 내꺼 전화 주세요’ 신아원 거주인 탈시설 의사 밝혔지만…’, 2021. 03. 04

[3] 조미경(2020), 「장애인 탈시설 운동에서 이뤄질 ‘불구의 정치’ 간 연대를 기대하며」, 시설사회, 와온, 95쪽

[4] 진성선,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몹시 사적이지 않은, 장애여성의 활동보조 이야기’, 비마이너, 2020. 09. 25

[5] 진은선,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아무도 묻지 않는 ‘장애여성의 섹스’를 말하다’, 비마이너, 2020. 08. 04

 

공감리뷰

댓글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