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시설의 의미 : 우리는 어떤 ‘시설’로부터 ‘탈’하고 하는가>
탈시설 : 보호와 분리라는 차별의 정치를 거부하고 동등한 시민으로 살겠다는 선언
※ 아래의 내용은 지난 2018년 6월 26일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숨]에서 진행한 <2018년 서울시 탈시설 정책 제안 토론회>에서 최나은 활동가가 발제한 글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018년, 탈시설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 ‘대구시립희망원 범죄 시설 폐지 및 탈시설 정책 추진’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새로 임명된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8월, 광화문농성장을 찾아 ‘장애인수용시설폐지 위원회’를 구성을 약속하기도 했다.최한별, 「비마이너,정부의 말뿐인 ‘탈시설’ 약속,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비마이너, 2017년 12월, ,http://beminor.com/detail.php?number=11698&thread=04r04
대통령과 복지부 장관이 나서서 ‘탈시설’을 천명해서일까. 2018년 1월 1일 부터 6월 3일까지 ‘탈시설’ 관련 기사는 총 542건에 달하며 6월 지방선거 후보들의 공약이나 시민들의 요구안 속에서도 탈시설 이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지난 몇 달간 서울을 비롯한 지역 곳곳에서 ‘탈시설’을 주제로 한 많은 토론회와 집회도 열렸다. 생소하고 낯설기만 했던,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도 관련 기사가 제대로 검색되지 않았던 ‘탈시설’이라는 것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쓰고 있다. 마치 탈시설에 대해 한국사회가 모두 환영하고 또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탈시설’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는 것은 지금까지 장애인운동이 탈시설을 전면에 내걸고 끊임없이 투쟁한 운동의 결과이며 성과라 할 수 있다. 또 탈시설이라는 문제의식이 한국사회 안에서 본격적으로 공론화 되고 있는 과정을 증명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 발제에서는 한국사회에서 탈시설의 개념과 의미를 짚어봄으로써 서울시의 탈시설 정책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탈시설의 개념
‘탈시설’ 이라는 단어를 조각내어 보면 ‘그것을 벗어남’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탈’과 장애인 거주시설을 줄여 부르는 ‘시설’의 합성어로 구성되어 있다. 즉 시설을 벗어난다는 간단하고도 명확한 의미이다. 하지만 탈시설은 그 단어가 위치한 맥락 혹은 말하는 주체, 다른 단어와의 합성을 통해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본래 탈시설이 가지고 있던 뜻과 방향은 여전히 그 단어에 있다.
첫 번째로 탈시설의 의미는 ‘장애인 거주시설에 살던 장애인이 시설을 나와 지역사회에서 사는 것’이다. 단어 자체가 가진 뜻을 그대로 풀어 쓴 것이다. 장애인 거주시설은 장애가 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장애인들끼리 몇 개의 건물에 모여 평생을 사는 곳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숙소(방)에 3명 내지 5명이 거주하고 있는 비율이 전체 응답자의 52.4%이었고, 6명 이상 거주하고 있는 비율도 36.1%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중증·정신장애인 시설생활인 실태조사 결과보고 및 정책토론회 보고서』, 2018.5, 10쪽. 즉 탈시설의 일차적 의미는 시설이라는 공간에서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탈시설의 두 번째 의미는 길들여진 몸과 삶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물리적인 공간에 대한 설명만으로는 ‘시설’이라는 배제의 공간과 통제된 삶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시설이 통제하는 것은 공간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주인들은 짜여 진 하루 안에서, 종사자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서너 평의 남짓의 방과 몇 개의 층으로 구성된 건물이라는 공간에서 움직여야 하는, 종사자-자원봉사자-거주인이라는 명확한 위계와 단편적인 관계 안에서 산다. 이러한 거주시설의 구조는 ‘내일이 궁금하지 않고 인생을 계획할 필요가 없는 사람’, ‘여긴 어딘가요가 아니라 여기는 몇층인가요 라고 묻는 사람’, ‘감사합니다/죄송합니다/사랑합니다 세 가지 문장으로만 대화하는 사람’을 만들어 낸다. 이처럼 거주시설의 한계이자 가장 큰 문제점은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상과 삶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할 수 없으며, 소수의 관리자에 의해 일생이 관리·통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설을 둘러싼 높은 담벼락이 없어도, 도시 한 복판에 위치해도, 대문이 활짝 열려있어도 거주인들은 시설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규칙과 규율, 시간표, 허락 안에서 평생을 길들여진 몸은 누군가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거주시설의 시스템을 자신의 몸을 통해 작동시킨다. 이 때문에 탈시설은 시설의 문 밖으로 나가는 것 뿐 아니라 시설에서 길들여진 몸과 생각, 과거의 기억들과 결별하고 다른 삶, 나의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진희, 「낯선이들의 예술하기」,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게이코러스 지보이스 뮤직캠프 발표문, 2018년 5월, https://chingusai.net/xe/index.php?mid=newsletter&category=534585&document_srl=534896
탈시설의 세 번째 의미는 지역사회 내에서 사회의 구성원인 시민으로써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는 시민으로써의 삶을 살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시설을 벗어난다고 해서 바로 시민으로써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을까. 누구와 어디에서 어떻게 살지 주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높은 턱 때문에 갈 수 없는 건물들, 중증 발달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참여를 거부하는 복지관, 할 게 없어서/뭘 해야 할 지 몰라서 방 안에서만 있어야 하는 하루, 아는 사람이 없어 대화상대라고는 활동보조인 밖에 없는 탈시설 장애인의 삶은 시설이라는 공간만 나왔을 뿐 지역사회 자체가 더 거대한 시설임을 확인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때문에 탈시설은 시설에서 나오는 것 뿐만 아니라 비장애 남성 중심으로 고안된 한국 사회에서 장애나 질병을 가지는 등 정상 규범 안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회 구성원으로써 동등한 시민으로써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 구조 자체를 바꿔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밖에도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은 거주인들에게 적정 수준의 생활 유지, 가능한 최고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누릴 권리, 개인적인 자유와 안전을 누릴 권리, 인권침해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퇴소할 수 있는 권리 등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중증·정신장애인 시설생활인 실태조사 결과보고 및 정책토론회 보고서』, 국가인권위원회, 2018, 12쪽.
이처럼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이 박탈당하는 이 공간을 편의시설이 좋다는, 산골짜기가 아닌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다, 개인별 맞춤 서비스가 제공된다는 설명만으로 배제의 공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시설에 살고 있는 많은 장애인들은 안락한 차별을 거부하고자 탈시설을 한다.
간단하고 명료한 ‘탈시설’의 개념이지만 특히 이것이 제도 정치에서 정책으로 구현될 때 그 의미가 다른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탈시설화라는 단어로 점진적인 탈시설 과정을 뜻하기도 하며, 거대 시설이 아닌 인권적이며 작은 규모의 시설로의 변화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탈시설은 시설로부터 탈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분리와 배제의 공간인 시설의 폐쇄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탈시설과 함께 시설 폐쇄의 의미 또한 함께 살펴봐야 한다.
탈시설의 전제이자 궁극적 목표, 시설폐쇄
첫 번째, 탈시설 정책에 있어서 시설 소규모화가 아닌 시설폐쇄를 지향하는 것은 그동안 ‘복지’라는 이름으로 특정 집단을 분리·격리해왔던 정책에 대해 국가가 과오를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사회에서 복지는 한국전쟁 이후 외국의 원조를 기반으로 각종 시설이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사회복지법인을 통해, 시설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복지정책의 틀을 만들어갔고 아동, 노인,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시설이 확대되어왔다. 임소연, 『진보평론-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살고싶다』, 진보평론, 2014년 59호, 269쪽.
1960년대 전쟁 고아, 부상당한 군인 등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시설은 군사정권 시기에는 부랑자 박정희 군사정권 당시인 1975년 제정되어 형제복지원의 부랑인 단속 및 수용을 정당화했던 「내무부 훈령 410호」일정한 주거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정류소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저해하는 모든 부랑인
, 가난한 사람, 수상한 사람을, 그리고 90년대에 들어서는 취약한 위치에 있어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수용하는 역할을 했다. 즉 국가의 정책과 필요에 의해 시설 입소를 하는 사람들, 시설의 명칭 등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계속해서 시설이 유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국가가 해야 할 복지의 책임을 민간 영역으로 떠넘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전히 시설이 존재한다는 사실 뿐 아니라 막대한 예산을 배정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 국가가 시설 정책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애 분야의 예산은 크게 ① 장애인소득보장(장애인 연금 및 장애수당) ② 장애인 활동지원 ③ 장애인거주시설 예산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 2018년 장애인 주거시설 운영지원사업의 예산은 4,619억 원으로 전체 장애 관련 예산 중 22~23%을 차지한다. 전체 장애인 인구 2,511,051명(2016년 말 등록 장애인 기준) 중 거주시설 장애인 입소자 수는 31,222명(2015년 기준)인 것에 비추어 봤을 때 장애인구 1.2%에 대한 예산으로 엄청난 예산을 들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또한 국가는 장애인 거주 시설 정책을 이용하여 시설이라는 간편한 복지 체계를 유지하려 함을 알 수 있다. 현재 장애인 거주시설 내에 수급자는 89.2%, 비수급자(실비 입소자)는 10.8%로 나타났다. 『중증·정신장애인 시설생활인 실태조사 결과보고 및 정책토론회 보고서』, 국가인권위원회, 2018, 10쪽.
이는 장애인의 시설 입소가 장애 뿐 아니라 빈곤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음을 보여준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높은 선정 기준과 낮은 보장 수준,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한 수급자 제외, 노동을 통한 생계유지 어려움 등은 최저수준의 생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시설을 택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사회적 취약계층 중에서도 제일 약자이자, 어려움에 위치한 사람들이 장애인거주시설로 입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복지 서비스 전달 지원체계의 부족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강제적인 선택이자 마지막 선택이 장애인거주시설 서비스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탈시설-자립생활, 진정한 의미와 방향은 무엇인가 토론회 자료집』, 2017년, 58쪽
따라서 국가는 정상성으로부터 벗어난 시민을 선별하는 기제로 시설을 활용하였고, 이를 현재까지도 유지 중이다. 또한 복지의 책임을 민간 영역에 떠넘기고, 편리한 복지 서비스 전달체계 및 정책으로써 장애인 거주시설 정책을 활용하였다. 이에 국가는 장애인 거주시설 정책을 폐기함으로써 시민들을 격리·배제한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있으며, 이때의 책임은 공식적인 국가의 사과와 더불어 지역 사회 내에 민간에게 맡겨져 분절되어 있는 사회복지 체계를 국가가 재구성하고 보편적 삶을 살기 위한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시설폐쇄가 가지는 의미는 수용의 논리이자 근거로 작동했던 ‘시설’이라는 것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장애인 거주시설’이 있는 한국사회에서 거주시설은 장애인이 갈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로 이야기가 된다. 때문에 ‘누가 시설에 가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 ‘장애가 있거나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이 간다’라고 답하게 된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왜 시설에 가는가’. 장애가 있어서? 지역사회에서 살기 어려워서? 의사소통이 어려워서? 아니다. 시설이 존재하기에 가는 것이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시설 입소 경로’이다. 입소 경위를 살펴보면, 비자발적으로 입소한 비율이 67.9%, 자발적 의사로 입소한 비율이 14.3%로 나타났다. 비자발적 입소 사유로는 응답자의 44.4%가 ‘가족들이 나를 돌볼 수 있는 여력이 없어서’라고 응답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잘 모르겠음’(21.5%), ‘다른 시설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시설로 보내서’(12.9%)라고 응답했다. 설문조사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다수의 거주인들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지에 따라 시설에 입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증·정신장애인 시설생활인 실태조사 결과보고 및 정책토론회 보고서』, 국가인권위원회, 2018, 10쪽.
즉 시설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설에 가는 이유들과 시설에 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진다. 가난하기 때문에, 장애가 있어서, 질환이 있어서, 누군가의 돌봄이 24시간 필요해서,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시설에 들어가야 한다는 간단한 논리가 만들어진다. 지역 사회 구성원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조건들을 사회적으로 마련하기 위한 고민이나 노력 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설은 하나의 선택지처럼 제시된다. 지역사회에서 살던 장애인이 시설을 입소하는 것을, 탈시설이 아닌 시설에 남는 것을, 탈시설을 결정하는 것을 장애인 개인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선택은 평등이 아니다. 우리는 선택을 자유로, 선택을 평등으로, 선택을 정의로 잘못 보았다. 왜냐하면 노동자와 소비자로서 매우 잘 조련 받아왔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사회관에서 보면 인간의 삶은 개인 자신이 책임져야 할 ‘선택’의 총합으로 여겨진다. 그 결과 돌봄은 순전히 개인의 문제이자 사적인 문제가 된다. 개인이 자신을 위하거나 자신의 주변을 돌보기 위해 개인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조안 C. 트론토, 『돌봄 민주주의』, 아포리아, 2014년, 101~102쪽.
하지만 가족 구성원 내에서 짐처럼 여겨졌던 재가 장애인이, 활동보조지원제도를 모르는 시설 거주 장애인이, 기초생활수급자도 아닌데다 노동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한 번도 무언가를 고민해보고 주체적으로 결정해본 적 없는 발달 장애인이, 장애가 심하면 시설에 가서 살아야 된다고 배운 중증 지체 장애인이, 평생을 시설에서만 살았던 장애인이 시설에서의 삶을 선택을 했다면, 이것을 진정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누군가 억압 받고 있다면 억압받는 자 앞에 놓인 선택은 단지 악성 선택일 뿐이다. 조안 C. 트론토, 『돌봄 민주주의』, 아포리아, 2014년, 102쪽.
즉 장애인 거주시설의 존재 자체가 ‘장애인은 시설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으로 만들며, 장애인 시설 수용을 옹호하는 논리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마치 선택지처럼 둔갑되고 있다. 따라서 시설이라는 차별의 논리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보호와 통제라는 차별의 정치를 박살내야 할 때
마지막으로 시설폐쇄는 보호와 통제라는 차별의 정치를 거부하고 시민으로써 동등하게 살겠다는 의미 이다.
한국의 장애인 복지법을 살펴보면 어떤 사람을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시민으로 설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장애인 복지법 제3조> 장애인복지의 기본이념은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 그리고 사회통합’에 의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비롯한 인권의식의 향상, 전 세계적 장애 복지의 변화 추세와 맞물려 장애인의 권리가 시민으로서 완전한 사회참여에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알맞은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뒤에 따라 나오는 <장애인 복지법 제 6조> 중증장애인의 보호는 이 기본이념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탈시설-자립생활, 진정한 의미와 방향은 무엇인가 토론회 자료집』, 2017년, 49쪽.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장애 정도가 심하여 자립하기가 매우 곤란한 장애인(이하 “중증장애인”이라 한다)이 필요한 보호 등을 평생 받을 수 있도록 알맞은 정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립하기가 매우 곤란한 장애인’은 누구이며 ‘보호’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자립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보호가 필요 없는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보호가 필요하다는 말이 일상에서는 ‘돌봄이 필요하다’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돌보며 산다. 밥을 잘 챙겨 먹는 것, 집 안에 먼지가 쌓이지 않게 청소를 하는 것, 계절에 맞게 옷을 챙겨 입는 것 등 살기 위한 대부분의 행위 들은 돌봄을 전제로 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돌봄이 있는가 하는 반면 타인에게 의존하는 돌봄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회적 소수자 혹은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는 의존적이며 돌봄/돌봄을 주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청소년에게는 어른과 가족, 장애인에게는 사회복지사와 거주시설, 노인에게는 요양사와 요양원, 여성에게는 남편 등 돌봐주는 사람이나 시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면 ‘자립할 수 있는-돌봄이 필요 없는 자’는 신체 건강하며 노동을 할 수 있는 비장애 남성으로 상상된다. 이런 인식은 ‘누가 시민인가’와도 연결되는데, 신체 건강하고 노동 효율성이 높다고 생각되는 비장애 남성은 시민의 표준이 된다. 즉 ‘장애 정도가 심하여 자립하기가 매우 곤란한 장애인이 필요한 보호 등을 평생 받을 수 있도록 알맞은 정책을 강구하여야 한다’라는 장애인 복지법 제 6조는 비장애 중심의 사회가 장애인을 스스로를 돌볼 수 없고 노동 생산성이 낮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며, 장애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기에 시설에 이라는 특정 공간에 격리하는 것이 ‘보호’라고 상상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시설은 하나의 공간이자 비장애 남성중심 사회가 장애인을 공적인 삶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분리·배제해왔던 차별의 논리이다. 『IL과 젠더 1차 포럼 탈시설 통제적 돌봄이 아닌, 잘 의존하는 삶』, 장애여성공감, 2017년, 29쪽. 이제는 시설 폐쇄를 통해 국가가 박탈했던 시민권을 되찾고 사회 구성원으로써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탈시설은 거주시설이라는 공간에서 나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비장애 남성 중심 사회가 의도적으로 장애인을 분리·배제해왔던 차별의 논리를 철폐하고 동등한 시민으로써 이 사회에서 살아가겠다는 개념이자 선언이다. 그리고 그 안에 좋은 시설 만들기 혹은 시설 소규모화를 통해 시설이라는 차별적인 공간을 존치시킬 이유는 없다.
때문에 서울시와 더불어 중앙정부의 탈시설 정책은 시설 소규모화가 아닌 ‘탈시설 및 시설폐쇄’로 그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근거가 없으면 만들면 되고, 기반이 부족하면 예산을 마련하면 된다. 더 이상 차별의 정치에 비용을 쏟는 일은 멈추고, 평등과 존엄의 정치에 투자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