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말 나의 독립 한글반’을 마치며
마지 (장애여성공감)
올해 법인 사무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저는 장애여성학교에서 ‘나의 말 나의 독립 한글반’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한글반을 시작하기 전 제가 참여자들에 대해 들은 정보는 모두 지적장애 당사자이고 탈시설 후 독립한 지 2~3년 차 정도 되었다는 것, 모두 작년 한글반에 참여했으며 두 분은 따라 쓰기가 가능하며 세 분 모두 작년 이후로 자기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애여성학교는 학교 시작 전 참여를 희망하시는 분들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이때 담당 활동가가 올해 학교를 소개하고 희망하는 반과 궁금한 점을 서로 확인합니다. 저는 이날 처음으로 참여자분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세 분 모두 나이를 제외하곤 제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전에 같이 한글반을 해서인지 서로 친숙해 보였고 처음 보는 저를 스스럼없이 대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놀랐던 건 참여자분들 모두 한글을 배우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는 점이었습니다. 의지가 없는 학생들을 데리고 했던 공부에 지쳐 떠났던 교실을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복귀하게 된 저로서는 이렇게 신바람 나는 조건이 또 있을까 싶어 모처럼 설렜습니다.
첫 시간 저희는 ‘독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 중간마다 중요한 단어를 제가 브레인스토밍 형식으로 화이트보드에 적었습니다. 앞에 적힌 단어 중 자신이 주어진 시간 동안 익히고 싶은 단어를 골라 종이에 쓰도록 안내했을 때였습니다. 참여자분들 모두 화이트보드에 적힌 저 단어는 어떻게 읽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제야 저는 세 분 모두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 진행한 한글반 일지를 살펴봤을 때 주로 쓰기 중심으로 활동이 진행되어 당연히 어느 정도의 읽기는 가능할 것이라고 혼자 추측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이렇게 첫 시간부터 헛다리를 짚고 당황한 저는 가능한 선에서 따라 쓸 수 있도록 안내하며 활동을 마쳤고, 부랴부랴 다음 회기부터 한글 읽기를 중심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활동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이번 한글반은 참여자가 직접 자신이 익힐 단어와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스스로 활동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목표를 잡았습니다. 첫 시간 때 저는 참여자마다 한글에 대한 선행지식과 친숙도, 익히는 속도가 저마다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기획할 때 어떻게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활동을 만들어갈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예컨대 한 분은 자음과 모음 각각 어떻게 소리가 나는지 확인한 뒤 이를 조합한 글자가 어떻게 발음되는지 설명하면 제 입 모양을 보며 따라 했습니다. “다”라는 글자가 포함된 단어 여러 개를 연속해서 따라 읽으면 그 글자를 스스로 짐작해 발음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설명에 다른 분은 책상에 고개를 푹 숙이고 계셨습니다. 앞서 함께 나눈 이야기를 언급하거나 단어를 설명하는 그림이나 사진을 보여주면 그제야 그 단어가 무엇인지 기억해 냈습니다. 또 다른 분은 수업 시간 안에 교실에 도착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설명을 들을 겨를조차 없었고 다른 참여자의 발음을 눈치껏 따라 하다 돌아가시곤 했습니다.
진행자마다 자신의 짝꿍을 지원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나갔습니다. 설명을 적극적으로 듣고 따라 하려는 참여자에게는 오늘 학습한 단어를 국어 노트와 단어 카드에 적어 보며 일상에서 한글을 스스로 익힐 수 있는 습관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글자 자체가 낯선 참여자는 자모 글자 모양 카드를 활용해서 글자를 눈에 익히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글자를 발음하는 법을 기억하기 위해 해당 글자를 설명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방법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시간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하는 참여자는 한글반 수업 시간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지하철 노선도를 문자로 보내거나 수업이 끝난 후 지하철 출구와 엘리베이터 층수를 직접 사진으로 찍도록 안내하며 스스로 교실을 찾아올 수 있도록 안내했습니다. 수업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주말도 불문하고 사무실에 수십 번 전화하는 대신, 스스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집에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을 스마트폰 알림으로 맞추고 약속 시간을 녹음하도록 했습니다.

진행에 드는 품이 저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과는 별개로 참여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매번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살고 싶은 ‘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지원 주택 코디와의 소통 문제로 속에서 열불이 나 살던 곳에서 뛰쳐나와 지금 고시원에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거나 전에 했던 ‘일’을 소개하는 시간에는 전 직장의 사장이 담배 심부름을 시켰을 때 담뱃갑을 사장 얼굴에 집어 던지며 ‘네가 사 와!’라고 소리쳤다는 무용담을 들었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의태어를 설명하다가 ‘두근두근’이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기억이 떠오르는지 물었을 때 시설에서 원장실에 불려 갈 때마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면 한글반에서 들은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언제나 제가 가진 그릇으로 담아내기엔 차고 넘쳤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집’, ‘일’, ‘감정’이란 단어로는 제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저와 다른 삶을 살아온 참여자들의 말을 놓치기 쉬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말들을 담을 만큼 제 그릇의 크기를 키우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크기를 키우긴커녕 매주 발생하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느라 저는 저의 그릇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매주 수업 중에 이동지원팀에서 걸려 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함께 수업을 진행하는 활동가들의 일정이 변동되면 계획과 다른 방식으로 활동 순서나 방식을 변경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저는 매번 첫 시간 때처럼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신기한 건 미리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이럴 때마다 제 곁으로 조용히 다가와 도와주는 분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번 주는 어떤 간식으로 할지 난감해할 때 제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다양한 간식 메뉴 아이디어를 제안해 주는 동료가 있었습니다. 전화받느라 정신없을 때 먼저 온 참여자와 함께 간식 준비를 도와주는 동료가 있었습니다. 이동 지원 관련 문의 전화를 대신 받아 대신 마중을 나가주는 동료가 있었습니다.
고정 진행자로서 저와 함께 한글반을 진행한 두 장애 여성 동료들과의 대화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은선 님이 한 참여자와 탈시설 과정을 함께 겪어내며 쌓아온 관계 덕에 저는 독립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걸 물어봐도 될지 망설이는 순간을 수월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화영 님이 발달장애 당사자로서 지하철로 이동하거나 시간 약속을 기억할 때 어떤 방식이 도움이 되는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준비한 활동이 적절했는지 자신 없어 할 때마다 두 동료의 아낌없는 응원 덕에 저는 금세 기가 살아서 다음 활동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두 동료가 준 가감 없는 의견 덕에 제가 흘려보내거나 놓치는 이야기를 뒤늦게라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참여자분들의 한글 공부를 향한 흥미와 열의를 북돋고 싶다는 것이 한글반 진행자로서 저의 목표이자 바람이었습니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저는 그런 제 마음이 참여자분들에게 가닿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론 그 목표까지 도달했는지가 그렇게 중요했던가 싶기도 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기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이었고 각자 원하는 목표도 달라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지만, 서로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끄덕여주었던 순간도 분명 있었기 때문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