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익명 출산이 아니라 권리 보장이다.
‘보호출산제’ 추진 논의를 중단하고 안전한 임신중지와 임신·출산, 양육 지원 체계를 강화하라
지난 달 출생통보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 익명출산제의 이름만 바꾼 ‘보호출산제’ 도입 논의가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보호출산제’ 관련 발의안의 수정 대안을 내놓은 데 이어, 아직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의 논의도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예산과 전달 체계까지 준비하고 있는 모양새다. 한편 18일 보건복지부는 출생미신고 아동 전수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2,123명의 아동 중 1,025명의 생존을 확인하였고, 249명은 사망 확인, 814명에 대해서는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국회에서는 영아살해죄와 영아유기죄가 형법에서 폐지되어 앞으로는 영아 유기와 살해가 일반 유기, 살인죄와 같이 다뤄지게 되었다.
출생미등록 아동과 영아 유기, 살해가 심각한 문제라는 데에는 당연히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이 현실은 어디서 기인하였나. 지금 정부와 국회는 가장 중요한 원인에 대해서는 책임을 방기한 채, 다시금 개인의 책임으로 모든 것을 전가하고 처벌로서 통제하려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피임도, 임신과 출산도, 임신중지도, 양육도 무엇 하나 안전과 지원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결국 모든 책임은 여성의 결정에 관한 문제로만 내맡겨지는 것이 아닌가. ‘보호출산제’는 사회적 차별과 낙인, 민법 등 법과 제도상의 문제, 재생산권 보장이라는 근본적 대책은 외면한 채 익명 출산만을 개인의 선택지로 유도하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지금은 ‘보호출산제’가 아닌 안전한 임신중지와 출산, 양육 환경을 구축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보호출산제’는 출생미등록 문제 해결의 대안일 수 없으며 아동의 권리를 침해하고, 재생산권 보장을 지연시키는 명분일 뿐이다.
출생미등록의 원인은 대부분 가부장적 법·제도와 문화,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인한 것이다.
당장 민법부터가 출생등록의 장벽으로 존재한다. 법적 혼인 관계 밖에서 출산한 경우 자녀의 생부가 아닌 법적 배우자가 자녀의 친부로 추정되는 민법 844조의 친생추정 원칙에 의해 혼외 자녀나 미혼부의 출생신고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민 사이에서 출생한 이주아동의 경우에는 아예 출생신고 제도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이번 보건복지부 전수조사의 대상에서도 제외되어 있으며 정확한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
홀로 자녀를 책임지고 양육하고자 해도 한부모 양육지원은 월 20만원(청소년 한부모의 경우 월 35만원) 수준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청소년, 장애인 등 사회적 취약층인 경우, 노동이나 주거 여건이 불안정한 경우 양육의 어려움은 더욱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한부모 양육에 대한 지원은 이토록 비현실적인 반면 양육 시설에 대한 지원은 아동 한 명당 월 150만원~200만원 수준으로, 국가가 양육 시설을 오히려 더 장려하고 있는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현실은 당연히 임신 당시부터 임신의 유지와 출산 여부를 고려하는 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대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상담과 정보를 제공하는 체계도, 당사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할만한 지원 체계도 매우 부족하다. 그 동안 한국 정부는 인구 정책에 따라 출산율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여성과 아동의 실질적인 권리 보장에는 사실상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형법상의 ‘낙태죄’와 모자보건법 14조는 여성에 대한 처벌이 언제든지 작동할 수 있게 하면서도 배우자 동의 조항으로 임신 당사자의 의사결정이 배우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며, 우생학적 명분의 임신중절을 합리화함으로써 국가에 의한 출산 통제를 합리화해 왔다. 이런 역사 속에서 미혼모 시설과 아동양육시설을 통해 수많은 아동이 친생부모를 알 수 없는 ‘고아’ 호적 상태로 해외로 입양되었다. 해외 입양은 국가가 매개하는 하나의 산업이었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해외 입양인들과 친생부모들이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이 이제서야 과거사 규명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출생미등록 아동 2천여 명의 현실 또한 이러한 역사가 누적되어 온 결과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해야할 역할이 무엇이겠는가. 여성과 아동의 권리를 침해해 온 차별적이고 부조리한 법과 제도를 바꾸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사회 여건과 양육 환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권리 보장을 위한 지원 체계 마련은 계속해서 뒷전으로 밀리는 현실에서, 익명 출산을 유도하는 ‘보호출산제’는 이러한 현실을 계속 유지시키고 변화를 지연시킬 명분으로만 작동하게 될 것이다.
익명 출산이 아닌 안전한 임신중지와 출산, 양육의 통합적 지원 체계 구축이 먼저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임신중지에 대해서도, 임신의 유지와 출산, 양육에 대해서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다. 임신을 중지해야 했던 여성들은 범죄화가 만들어낸 차별적이고 비공식적인 보건의료 환경과 사회적 낙인 속에서 건강과 권리를 침해당해 왔고, 임신중지 시기가 지연되어 더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임신을 유지할 수밖에 없어 출산을 하게 된 경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양육 환경에 고군분투하거나 시설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자녀를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놓였다. 또 누군가는 출산하여 양육하고자 해도 자신의 의사결정을 존중받지 못해 타인에 의해 임신중지를 강요당했다.
이제는 이런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보호출산제’는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과 제한적 허용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특정한 상황과 조건을 ‘위기 임신’으로 구분하여 지원하고, 제도적 지원과 양육 환경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 익명 출산을 유도하게 되는 방식이다. 유사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국가는 모두 이런 법·제도적 한계 속에서 운영해 왔고, 이를 시행하지 않는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아동 유기나 살해에 있어 실질적인 효과가 입증되지 않는 반면 익명 출산으로 인한 여성과 아동의 어려움은 계속해서 보고되어 왔다.
한국은 이미 임신중지에 대한 법적 처벌이 효력을 상실했고 권리 보장 체계 구축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이다. 그간의 구조적 문제를 넘어 더 나은 체계를 구축해야 할 과제가 있을 뿐 같은 한계를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2019년 한국 정부가 제출한 제5-6차 국가보고서에 대한 심의 의견에서 “종교단체가 운영하면서 익명으로 아동 유기를 허용하는 ‘베이비박스’를 금지할 것”을 권고하였고, 병원에서 익명으로 출산한 가능성을 허용하는 제도의 도입은 ‘오직 최후의 수단으로’ 고려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이제는 ‘보호출산제’가 아니라 안전한 임신중지와 출산, 양육의 통합적 지원체계 구축을 시작해야 한다. 임신중지의 비범죄화는 단지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 중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임신과 출산, 양육에 관여하는 모든 상황에 대한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지원 체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보건기구 또한 완전한 비범죄화와 함께 ‘포괄적 임신중지 케어’의 방향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이제 ‘위기 임신’이나 ‘임신 갈등’의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임신을 한 시점에서 누구나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와 지원 체계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임신의 유지와 중지를 고민할 때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에 따른 지원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국가가 그에 맞는 보건의료 체계와 사회 보장 등 지원 체계를 탄탄하게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 건강보험 적용 확대와 유산유도제의 도입, 원가정 양육 지원 체계 확충, 보편적 출생등록제의 시행, 이주민의 거주 여건 보장, 장애인 권리 보장 체계의 확충, 포괄적 성교육의 시행과 확대, 차별금지법 제정 등을 위한 노력이 이를 위해 병행되어야 할 일들이다.
몰래 낳는 것으로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익명 출산이 아니라 권리 보장이다. 우리는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법·제도 마련을 외면하고 우리의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아동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 권리를 침해하는 ‘보호출산제’ 도입 논의에 반대하며 향후 이를 도입하려는 시도에 맞서 함께 싸워나갈 것이다.
정부는 먼저 권리 보장을 위한 노력에 책임을 다하라.
2023년 7월 21일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