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웹소식지 > 현장리뷰 > 제주 몸이동(異動) 워크숍, 체면의 주파수가 아닌 품위의 주파수 맞추기

지윤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

제주에서 아주 다르지만 또 같기도 한, 그러다가 또 무척이나 달라져버리는 몸들의 이동을 함께했다. 조금 알 것 같은 순간이 가장 두렵고, 조금 따뜻한가 싶을 때 가장 싸늘해지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어떤 몸으로 여기 와서 어떤 몸의 동료들과 있는지, 여기서 내가 무얼 내려두고 무얼 가져가야 할지 생각했다.

나는 여행을 가면 주로 로비 화장실을 이용한다. 냄새를 풍기는 게 싫어서 그렇다. 부은 얼굴이나 몸을 보이기 싫어 일찍 깨어 있기도 한다. 출발하는 날 아침에 짐을 챙겨도, 약속 시간을 30분 앞두고 택시를 잡아도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 늦을 것 같으면 좀 뛰면 된다. 비행기를 많이 타보지 않았어도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 가끔은 동행한 상대의 기분을 망칠까 몸이 아파도 내색하지 않는다. 그 정도가 나의 불편이고 나의 이동은 사실 아주 편리하다. 살면서 내가 체면을 구길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내가 보이기 싫으면 보이지 않을 수 있고, 숨기고 싶으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체면’을 챙길 수 있던 건 나의 몸과속도가 그걸 담보해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체면을 챙겨왔다고 품위를 지켜온 건 아니었다. 장애여성 동료들이 지키고 있던 건 체면이 아니라 품위였다. 떠나기 전 장애여성 동료들의 밤과 아침, 내가 헤아릴 수 없이 치열했을 그 시간들에는 품위를 지키고자 하는 힘이 있었다.

나의 동료는 생명줄이라고 말하는 호흡기를 포장하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고, 그 호흡기와 함께 이동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한 서류를 끼고 다녔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공항 직원의 질문에도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힘을 주며 대답을 건넸고, 기내용 휠체어로 갈아타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일이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게끔 살폈다. 자신의 속도와 몸의 상태를 들여다보며 자신에게 필요한 돌봄을 요청했다. 내가 처음으로 차에 설치된 리프트를 사용할 때 휠체어를 잘 고정시킬 수 있도록 격려해줬고, 과속방지턱을 넘다머리가 천장에 닿아 부딪혀도 장애인콜택시를 타며 겪었던 경험들을 들려주며 오히려 내 긴장을 풀어줬다. 내가 그때 느낀 것이 바로 품위였다.

 

사진 1. 제주 몸이동(異動) 워크숍 첫째날. 장애여성들이 휠체어에 앉거나 바닥에 서서 상체를 뒤로 젖히거나 고개를 들며 몸을 풀고 있다.

사진 1. 제주 몸이동(異動) 워크숍 첫째날. 장애여성들이 휠체어에 앉거나 바닥에 서서 상체를 뒤로 젖히거나 고개를 들며 몸을 풀고 있다.

 

내가 지킨 체면은 취약함을 두려워하고 그걸 감추는 방식이었다. 폐 끼치지 않으면 됐고, 나의 필요는 들키지 않게 뒤에 두면 됐다. 그 방식은 꽤 쉬웠고, 별다른 훈련 없이도 익힐 수 있었다. 그런데 장애여성 동료들이 지킨 품위는 취약함을 감추지 않으면서 자신의 존엄과 상대방의 존엄을 함께 지키는 방식이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시간을 이야기하고, 그 시간에 상대방이 참여할 수 있게 제안하며 돌봄을 공동의 것으로 만들었다.각자의 취약함 앞에서 숨지 않으려 애썼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고, 그걸 체득해왔을 시간들을 떠올리면 아득해지기도 했다.

우리의 이동을 라디오에 빗대자면, 제주에서 보낸 시간은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 소리를 소음으로 여기지 않고 함께 맞춰가는 시간이었다. 평소의 나는 음악이 영 별로여도 기왕이면 소리가 선명한 주파수에 맞추려고 했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소리가 조금 지지직거려도 그 소음을 함께 견디며, 여러 차례 다이얼을 앞으로 돌렸다가 뒤로 돌리기를 반복하며 서로가 괜찮은 주파수를 찾아갔다. 나의 주파수가 체면의 주파수였다면, 장애여성 동료들과 함께 맞춰가는 주파수는 품위의 주파수였다. 나를 돌보고 상대를 돌보는 힘이 이 주파수에서 재생된다.

“나는 장애여성이 몸의 시간을 안다고 생각하거든요.” 워크숍 때 한 장애여성의 말이 계속 감돈다. 나의 동료들은 내가 생각하지 못하고 살던 속도를 생각하게 한다. 그게 나를, 내 주변을 또 돌볼 수 있게 한다. 내게 기꺼이 나눠주는 경험들, 그앞에서 계속 체면만 차리면서 내가 이들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까. 제주에 두고 온 게 있다면 그게 체면이길 바란다.

 

사진 2. 몸이동 워크숍 둘째날. 장애여성들이 양쪽에 나뉘어 앉아 서로를 마주보거나 등지고 있다. 설득하고 설득되거나 거절하는 과정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진 2. 몸이동 워크숍 둘째날. 장애여성들이 양쪽에 나뉘어 앉아 서로를 마주보거나 등지고 있다. 설득하고 설득되거나 거절하는 과정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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